(제1부. 복음과 영혼의 변화)
인간 존재의 특이 점은 외부의 풍요 속에서도 내면의 빈곤을 경험함이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마음은 더 퇴보하고, 촘촘한 네트워크 속에서 고독은 깊어진다.
복음은 잃어버린 중심의 추를 내리는 '내면의 중력'이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마태복음 16: 26)
세상이 미친 듯이 빠르게 달려간다. 일의 속도는 마음의 속도를 초과했고,
'경제적 자유'를 향한 꿈은 오히려 영혼의 자유를 삼켜버렸다.
우리는 무한한 기술의 혁신 속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지만 실상 자유를 얻지 못한 채 쉼을 잃어가고 있다.
현대인의 내면은 텅 빈 메아리처럼 공허하고 그 속에는 과잉의 각성이 공존한다.
풍요의 시절 과잉의 과잉이 도리어 결핍이 되어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온다.
불안함과 두려움은 쉼을 위해 쉼을 거부하는 워크 홀릭 세상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변명하기 어려운 영혼의 피로다.
활기찬 듯 분주한 듯 비어 있는 세대, 하나님의 임재를 자기의 효율과 바꾼 세대다.
성경은 이런 시대를 이미 진단했다.
사사기 말미의 한 구절이 오늘의 현실과 너무도 닮아 있다.
"그때에는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사사기의 불안 — 자기 방식으로 신을 통제하려는 사람들 (삿 17장 미가의 성소)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다, 각자가 자기의 소견을 신으로 섬기며 살아가던 시대였다.
당시 에브라임 산지에서 살아가던 미가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이웃 나라의 침입이 이어지고, 사회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했다.
그는 불안을 달래기 위해 은을 녹여 자기 집에 신상을 세웠다.
그리고 지나가던 레위인을 붙잡아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 아노라"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여 불안을 통제하려 했다.
당시의 믿음은 하나님과의 신뢰의 관계가 아니라 '심리적 안전장치'로 변질된 상태였다.
사사기의 어둠을 우리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각기 자기 방식으로 신을 조립한 극도로 불안한 인간의 모형이라고...
오늘의 현실 — 불안의 양식이 만들어낸 새로운 윤리의식
다시금 미가의 시대가 우리 앞에 도래했다.
사람들은 목청을 높여 말하고 있다.
"정직하게 살면 손해죠. '
다른 이는 말한다.
"내 행복이 제일 중요해요. 남 눈치 볼 필요 없죠."
"내가 있어야, 가족도 남도 있는 것이죠!!
나의 시대. 1인 미디어의 각자 주장의 시대. 핵심은 분열이다.
그 말들 속에는 두려움이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 관계의 불신, 정의로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이다.
그런 시대의 특징으로 도드라지는 것은 옳음보다 유리함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자기 소견에 옳은 데로 행하는 현대인의 얼굴이다.
눈에 뵈는 신상이 아니어도 , 불안은 이미 우리 안에 커다란 신상을 세운 지 오래다.
허나 솔직한 심경으로 말하건대
나는 나의 소견에 대해서 신뢰를 잃고 많았던 확신에 대해서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 오래되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오늘날 우리에게 이 말씀은 성경의 명언이나 대학의 표어가 아닌 믿음의 언어로 살아 있는가?
절대적 기준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 너는 자유로운가?
아니면 파랑새를 찾아 떠나듯 '나에게 맞는 하나님'을 찾아 아직도 헤매고 있는가? 돌아볼 일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렇게 자기를 정의했다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계 3:17)
그러나 주님은 전혀 다른 말씀으로 그들을 바라보셨다.
"네가 곤고하고 가련하며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자본으로 넘치는 시대 속에서 우리 영혼의 파리함.
정보는 넘치는데 생명의 말씀은 사라진 시대의 영적 고갈의 상태.
복음보다 자기를 확신하는 그 얕은 뿌리가 이미 흔들리고 메마른지 이미 오래다.
엘리야조차 그런 시절을 살아내며 광야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내 생명을 거두소서." (왕상 19:4)
무엇이 넉넉한가?
진심으로 그러한가? 자본주의에서 드러난 영적 기갈이 온 세대를 덮고 있다.
'내 생명을 거두소서'라는 이면에는
엘리야와 같이 뜨거운 선지자도 버거워했던 시대적 난제가 있음을 실토하는 것이리라.
예배를 드리지만
기도를 하지만, 하늘의 침묵이 흐르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고 있다.
복음은 이 흔들림의 한가운데로 들어온다. 저벅저벅 걸으시며 오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우리 내면의 재구조화, 즉,
마음의 중심축을 다시 세우는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믿기 시작할 때 영혼은 새로운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우리 시대의 외줄을 타기
현기증을 일어나는 시대살이는 오직 복음으로 만 그 균형이 가능한 것이다.
묵상
흔들리는 영혼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의지가 아니라
"돌아서라(שוב, 슈브)"는 부드러운 초청이다.
복음은 자기를 잃어버린 인간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려 불러들이는 힘이다.
이 부름에 응답할 때, 우리는 홀로 외줄 타는 세상에서 우리가 믿는 바 신앙으로 영혼의 균형을 지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