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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1장 일터 그리고 예배.

(복음과 시장의 변화)

by 향상

일터는 현대인이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머무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점점 더 치열한 경쟁의 터가 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 3:23)




오늘의 시대를 만드는 노동의 얼굴

오늘의 시장에서 노동자와 사용자는 공히 성과 압박, 조직의 재편, AI 자동화, 등으로

미래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이 가득하다.

사람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지만 자기 존재의 의미는 더 옅어지고 있다.

노동이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아니라 내면의 피로와 고독이 집중되는 자리가 되고 있다.


우리는 왜 이토록 지치도록 일하고 작은 일속에서도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는 것인가?

그 질문의 배후에는 한 가지 깊은 결핍이 자리한다.

일은 인간에게 존재의 의미를 주도록 설계되었지만, 오늘의 일은 존재의 의미를 빼앗고 있기 때문이다.


에덴에서 시작된 일의 본질은 오늘날의 노동 개념과 큰 차이를 가진다.

"노동은 예배"다라는 주장이 그 핵심에 자리한다.

우리는 흔히 일을 "생계 수단"으로만 여긴다. 그러므로 생사의 긴장감을 가지고 일을 대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시각의 출발점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세기 2:15)


여기서 "경작하다"는 히브리어 아바드(עָבַד).
이 단어는 일하다(work) 섬기다(serve) 예배하다(worship) 세 의미가 합쳐진 것이다.

즉,

일은 예배였고, 예배는 노동이었다.

일은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돌보는 창조적 협력 행위였다.
노동은 하나님 나라를 일구고 세우는 창조의 연속성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하녀가 바닥을 닦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세상을 섬기신다."

그는 사제직과 평신도의 일을 구분하지 않았다.

우리의 노동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이다.'

가사와 서비스 현장 그리고 예술과 무대와 건설 제조까지 모든 곳에 그분의 사역자들이 등장한다.


또 하나 지키게 하라는 단어의 중요성이다.

여기서 '지키다'는 히브리어 샤마르(שָׁמַר, shamar)다.

이 단어는 보호하다 (guard) 보존하다 (preserve) 돌보다(care) 준수하다 (heed/observe)가 합쳐진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의미는 침입자로부터 보호이다.

에덴에 악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지키는 영적‧윤리적 역할이다.

보존함이란 있는 것을 잘 유지하고 관리하는 책임감이다. 이는 질서와 선함 속에서 이뤄가야 했다.

돌봄은 단순한 방어적 차원이 아니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성 속에서 이뤄지는 보호자의 개념을 포함한다.

마지막 준수하다의 의미가 생소하지만 새롭고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순종하여 지키다(keep the commandments)"라는 의미다.

하나님과 언약을 노동을 통해서 지켜 내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성경의 정신이다.


하나님의 에덴의 주된 일은 만들고 창조하는 일과 지키고 돌아보는 일이었다.

즉 하나님은 두 축을 인간에게 동시에 맡기셔서 그 낙원을 맡아 관리하게 하셨다.




타락 이후 — 일터가 성소에서 전쟁터로 바뀌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일은
예배의 연장선이 아니라 고통의 자리(창 3:17–19)가 되었다.

땅은 가시를 내고, 수고는 번아웃을 만들고, 노동은 불안과 경쟁, 상실의 얼굴을 갖게 되었다.

오늘 우리 노동의 피로는 단지 산업 구조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 질서가 끊어진 데서 시작된 결과다.


그래서 일터 회복의 핵심 원리는 조직 혁신도, 자기 계발도 아닌 것이다.

하나님과의 질서가 다시 서는 것, 노동의 질서는 거기서 회복이 시작되는 것이다.


복음은 일터를 다시 성소로 부르신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노동의 목적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골로새서 3:23)


'주께 하듯'이라는 말은 일의 동기를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초대다.

상사에게 하듯 하던 노동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행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일터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한 전쟁터가 아니라 복음의 질서가 흐르는 성소가 된다.

그때 노동은 성과의 무대가 아니라 소명의 무대가 되고,
끝없는 자아 소모는 새롭게 자아를 인식하고 성장하는 기회가 된다.


자유로운 마음의 상태로 일구는 자발적 노동이 더 나은 성과를 창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직장인 + 영적인 사람"으로 나누지 않는다.
일하는 그 사람이 예배를 드리는 그 사람이라고 말하고 계신다.


바울 — 장막을 만드는 손, 복음을 짓는 삶

바울은 일평생 장막을 만드는 직업인으로 살았다.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에서, 에베소에서 그는 낮에는 복음을 전하고
밤에는 가죽을 손질하며 장막을 만들었다.

그 손은 로마 제국을 뒤흔든 복음의 손이었고, 동시에 노동의 땀을 흘린 신실한 장인의 손이었다.

바울에게 노동은 생계가 아니라 복음을 드러내는 영적 정체성이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했다." (데살로니가후서 3:8)


장막을 꿰매는 그의 손끝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세우셨고, 그의 내면을 단단하게 재구조화하셨다.

바울에게 일터는 복음을 전하는 통로였고 자기 영혼이 깨어지는 성소의 자리였다.




묵상

일은 우리를 지치게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의 자리에서 우리를 또 새롭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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