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시장의 변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부를 축척한 시대, 그러나 마음은 더 가난해졌다.
이전 보다 더 많이 가졌지만 더 불안하고
더 편리함을 누리지만 더 고독하다.
그리고 더 빠르게 살지만 왜 이토록 비어 있는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9)
이 모순은 단순한 경제 구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부의 양을 따지던 시대를 지나서 이제 부의 질의 문제를 따지고 있다.
현대의 부는 '축적'을 통한 만족이 아니라 '의존' 가능한 인격체로서 부를 향해 달리고 있다.
소비를 통해서 주어 지는 우리의 쾌락은 사실상 만족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니 이 넘쳐나는 정보의 풍요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고 있다.
풍요 속 빈곤이라는 역설은 수 없이 되내어 왔지만 정말 그런 시절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왔다.
아모스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이 표현은 현대 사회에서 적중한다.
"영혼의 고갈, 방향 상실, 진리 부재"그래서 모두가 배고프고 주린 시절이다.
결국 영적 붕괴 앞에 선 시대를 향해 단순한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얼마나 부자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부를 따르고 있는가?"이다.
나는 그래서 배부르고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돈에 대해서 시대적 관점보다 관대함을 조금은 더 지니고 있는 것인가?
고후 8:9의 원어가 말하는 '부요'와 '가난'의 의미를 되짚어 보아야 한다.
"부요하신 이" 헬라어 πλούσιος (플루시오스)
'풍성한', '넘쳐흐르는', '부족함이 없는'이 단어는 물질보다 '존재의 충만함'을 강조한다.
예수의 부요함은 하늘의 권세, 생명의 충만, 사랑의 넘침이다.
"가난하게 되심" 헬라어 πτωχεύω (프토헤우오)
'완전히 비워내다', '스스로 낮추다', '권리를 포기하다'
이 또한 "가난한 삶"이 아니다. 스스로 비움의 방식으로 존재를 재 구성하는 행위를 말하고 있다.
주님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 '자발적 비움(voluntary poverty)'이다.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헬라어 πλουτίζω (플루티조)
'내면을 풍성하게 하다', '영적 능력을 부여하다'
예수의 가난은 모든 제자들에게 가난을 요구하기 위한 종교적 전제가 아니다.
새로운 부요에 대한 질서를 열어 주기 위한 것이다.
돈에 메여 자유와 삶을 잃은 시대에 그들의 제자들이 존재의 풍요로 새롭게 살기를 원하던 선언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그분의 '가난'은 우리의 '영적 부요'를 위한 길이었다.
자리의 다툼에서 권리와 소유와 명예의 자리에서 비워냄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로 다시 채우기 위해서였다. 소위 회복을 목적하는 청빈이다.
소유가 관계를 가리는 순간 사람을 잃는다.
예수는 사람을 얻기 위해 소유를 내려놓았다.
빌립보서 2장은 말한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비움은 수동적 결핍이 아니었다. 충분히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비워냄으로 이루고자 했던
능동적인 사랑의 방식이었다.
또 한 가지 가난함으로 오히려 자유 하셨다.
'무의 삶 속에 놓였을 때 지금껏 나는 어디에 메여 살고 무엇을 의지하고 살았는지 깨닫는 것이다. '
그분은 소유의 자유가 아니라 존재가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가난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나를 따라오라." 이 초청 안에서 가난은 목적이 아니라 관계의 결과다.
예수께 가까이 갈수록 지금 잡고 있던 것에 느슨해지고 소유보다 존재가 중요해지고
'가짐'보다 '됨'이 우선이 되었다.
이 새로운 정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높아져야 이 결핍의 시절을 넘어설 수 있음이 분명하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는 아르헨티나 복음주의 지도자이다.
그는 40대 초반, 수만 명의 교인을 돌보던 소위 성공한 목회자였다.
그러나 어느 날 그가 이런 음성을 들었다고 기록한다.
"너는 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공을 따르고 있다." 그는 충격 속에 교회를 사임했다.
그리고 아내와 자녀를 데리고 가난한 동네로 이사했다.
오르티즈는 이일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한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나는 처음으로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의 사역은 이후 더 넓어졌고, 그의 글과 설교는 세계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는 가난을 명령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을 사랑하면 가난해질 용기가 생긴다."
충격과 감동의 예화이지만 이것은 도덕이나 청빈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영적인 방향성의 변화가 이룩한 자유의 회복이다.
가진 것이 많아지는 시절이면 '가난'의 영성은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재산을 줄이고자 하는 행위를 넘어서 우리 삶이 누구를 향해 나아가는가?를 질문하는 삶이다.
돈이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오히려 경계를 세워가자.
소유로 인해서 관계가 아픔을 겪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내자.
그것이 성경적인 청빈이며 더 나아가서 그것만이 존재의 부요를 지키는 길이 됨을 잊지 말자!!
묵상
부요는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느냐의 문제다.
숨 가쁜 당신의 하루가 더 할 수 없는 존재의 가득함을 누리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