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문화의 변화)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창세기 11:4)
이 한 절 안에는
문화의 탄생, 문화의 왜곡, 문화의 우상화가 모두 담겨 있다.
문화는 중립적이지 않다
우리는 흔히 문화를 "취향의 영역"이나 "개인의 선택"으로 가볍게 말한다.
그러나 문화는 언제나 방향을 가진 힘이다. 문화는 사람을 만든다.
사고방식을 만들고, 욕망의 모양을 만들고,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지까지 형성한다.
그래서 문화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그 문화가 하나님을 향하느냐, 아니면 인간 자신을 향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영혼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빚어진다. 성경은 문화의 기원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 출발점은 예술도, 기술도 아닌 어쩌면 "이름을 남기고자 했던 인간의 욕망"이었다고.
바벨탑 — 하나님 없는 창조의 원형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는 단순한 고대 신화나 건축에 대한 실패담이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는 문화가 어떤 방향으로 흐르는지를 보여주는 문화사의 원형이 된(Prototype)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자."
그러나 성경은 그 동기의 뿌리를 정확히 짚어간다.
"우리 이름을 내자."
문제는 기술이 아니었다. 문제는 중심이었다.
하나님을 향해 열려야 할 창조의 에너지가 인간 자신을 향해 쏠려 버린 순간,
문화는 예배가 아닌 인생 기념비가 된다.
바벨탑은 하나님을 부정하기 위해 세워진 탑이 아니었다.
하나님 없이도 충분하다고 선언한 위험천만한 문화의 첫 구조물이었다.
원어를 통해서 본 바벨의 문화적 죄성을 나열해 보자면,
"건설하다" — בָּנָה (banah) 이 단어는 집, 성읍, 제단, 왕국을 세울 때 쓰인다.
즉, 바벨은 하나님을 벗어난 인간의 문명과 문화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하늘에 닿게 하다" — שָּׁמַיִם (shamayim)
하늘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다.
바벨은 예배자가 아닌 스스로가 초월자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이름"— שֵׁם (shem)
이름은 명성 이전에 정체성이다.
바벨 문화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름 대신 스스로를 신격화한 이름을 세우려 했다.
다시 한번 손을 뻗어 선악과를 먹고자 하고 결과 하나님 처럼 되고자 했던 사건이다.
흩어짐 — 징벌이 아니라 보호였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개입 방식이다. 하나님은 탑을 무너뜨리지 않으신다.
사람들을 흩으신다. 이는 자기 신격화로 치닫는 문명에 대한 보호 장치였다.
하나의 언어, 하나의 욕망, 하나의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문화는 결국 인간을 소모시키고 파괴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 문화가 절대화되기 전에 사람들을 흩으셨다.
그것은 또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였다.
오늘의 우리는 곳곳에서 바벨을 본다 — 화려하지만 공허한 문화
오늘 우리는 탑을 쌓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바벨을 만든다.
- 성과로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치열한 경쟁
- 감각으로 진리를 대체하고
- 즉각적 쾌락으로 의미를 소홀히 대한다.
오늘의 문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다.
"느껴지는 것이 진짜다."
"불편하면 틀린 것이다."
"속도가 곧 진보다."
그러나 이 문화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비교하게 하고, 지치게 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게 만든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내면은 점점 말라간다. 바벨 이후의 문화가 늘 그래왔던 것이다.
다니엘 — 타락한 문화 속에서 순수를 지킨 한 사람 그리고 덴젤 워싱턴
바벨론은 고대 세계 최고의 문화 강국이었다.
학문, 정치, 예술, 종교가 모두 정교했다.
다니엘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문화의 한복판에서 살았지만 문화에 흡수되지 않았다.
그 비결은 단순했다. "뜻을 정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단 1:8)
예화) 할리우드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은 한 사람
할리우드는 현대 문화의 바벨이라 불릴 만하다.
욕망은 미학으로 포장되고, 폭력은 서사로 정당화되며, 하나님 없는 인간의 이야기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그 한복판에서 "덴젤 워싱턴"은 오랫동안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서 있었다.
그의 신앙은 장식이 아니었다. 경력 관리용 수사가 아니었고,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언어도 아니었다.
그는 여러 인터뷰와 수상 소감에서 반복해서 말했다.
"내가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재능이 아니라 기도였다."
어머니의 기도, 탈선을 막은 보이지 않는 울타리
덴젤 워싱턴은 젊은 시절,
배우로서 성공하기 이전에 여러 차례 탈선의 문턱에 서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때마다 그를 붙잡은 것은
어머니가 남긴 한 문장이었다.
"아들아, 하나님은 너를 위해 계획을 갖고 계신다."
그는 훗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머니의 기도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문화의 힘보다 강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기도의 축적이었다.
침대 아래의 신발 —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하루를 시작하다
그의 신앙 고백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화려한 레드카펫이 아니라 침실에서 시작된다.
덴젤 워싱턴은 매일 밤 신발을 침대 깊숙이 밀어 넣었다고 한다.
아침이 되면 신발을 꺼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는 말했다.
"기도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는다.
이미 가장 낮은 자세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을 고를 때마다. 끊임없이 질문했다고 한다.
- 이 이야기는 인간을 어떻게 그리는가?
- 죄를 미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 하나님 없는 구원이 확대된 것은 아닌가?
그는 말씀을 읽으며 바벨보다 높은 유혹, 곧 "하나님 없이도 충분하다는 서사"와 싸웠다.
그래서 그는 할리우드 스크린을 자신의 강단(pulpit)으로 여겼다.
70세의 안수 — 성공 이후에 선택한 낮아짐
덴젤 워싱턴은 70세의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으며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카데미상, 명성, 그리고 재산"
그것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성공의 꼭대기를 향해 달리라고 말하지만,
'낮아지는 길'에 서서 소명의 완성을 이루는 그것이 최 정상의 삶이다. 고백했다.
새로운 문화는 거절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기독교는 문화를 파괴하려 들지 않았다.
복음은 문화를 정화하고, 재해석하고, 새롭게 한다.
새 문화는
- 더 큰 소리에서 나오지 않고
- 더 화려한 무대에서 나오지 않는다
복음의 문화는 인간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에게서 시작된다.
예배하는 예술가, 정직한 기획자, 침묵을 지킬 줄 아는 사상가,
그들이 만드는 문화야 말로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영혼을 살리게 되는 것이다.
묵상
나는 문화를 소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문화 속에서 중심을 지키고 있는가?
하나님 없는 창조는 언제나 인간을 주인 자리에 앉힌다.
그러나 복음은 다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문화를 예배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