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2장 복음! 다시 예술을 노래하다

(복음과 문화의 변화)

by 향상

선악과 그리고 바벨탑의 미학과 하나님의 아름다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 시편 150:6



아름다움은 사상보다 먼저 인간을 사로잡는다.

오늘날 문화의 가장 강력한 전달 수단은 예술이다.
그중에서도 음악과 영화는 사상 이전에 감각을 통과한다.

사람은 생각하기 전에 느끼고, 판단하기 전에 끌리며, 동의하기 전에 이미 마음을 내어준다.

그래서 예술은 설명하지 않으며 예술이 설득해 낸다.


이 설득은 논리의 언어가 아니라 리듬과 이미지, 음색과 장면의 언어다.

바벨탑 사건 이후 문화가 가장 세련되게 진화한 지점은 권력이나 제도가 아니라 미학(mimesis)이다.
무엇을 닮게 만들 것인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성경은 이 사실을 너무도 정확히 알고 지적해 왔다.

그러므로 미학,

곧 예술을 향한 우리의 눈은 조금 더 세밀하고 이성적인 고민을 통해서 받아들여야 할 그 무엇이다.


성경이 말하는 첫 번째 미학의 타락

성경에서 인간이 죄에 빠지는 첫 장면은 짧은 논쟁에 이은 매혹 ‘보는 것’이었다.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창세기 3:6) 여기서 "보암직하다"는 히브리어는 חָמַד (하마드) — 강렬하게 끌리다, 욕망하다는 뜻이다.

태초에 인간이 저지른 그 무거운 죄가 명령을 어겨야겠다는 '논리적 결단'이 아닌 끌림에서

시작된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왜곡된 설득은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에도 등장한다.

우상은 우리에게 얼마나 혐오스러운 것인가? 그런데 그것이 처음부터 추했던 것인가?

금으로 만들었고, 눈에 띄었고, 안정과 번영을 약속하는 상징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말한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신이로다."

우상은 대부분 보기에 좋았고, 느끼기에 안전했으며, 즉각적인 만족을 주었다.


슬프게도 우리 곁의 미학은 항상 신학보다 먼저 인간을 설득한다.

성경에서 자주 그리고 번번이 실패한 하나님 없는 아름다움은 그렇게 진행된 방향의 오류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체하려는 아름다움이었다.

이 구조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무한하게 연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오늘의 음악과 영화 — 감각이 진리를 대신할 때

오늘의 음악은 무엇을 노래하는가?
오늘의 영화는 어떤 인간상을 아름답다고 말하는가?

즉각적 쾌락

파괴적 자유

책임 없는 사랑

고통 없는 선택

쉼과 위로에 대한 한없는 갈망

이 모든 것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감각적 아름다움이다. 그것을 진짜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 (렘 17:9)


오늘날 예술의 현장은 이 말씀에 대한 겸허한 수용이 사라졌다.

아쉽게도 부패하고 거짓된 마음의 표현이 대중 예술의 주류가 되고 있다.

그렇게

예술은 인간의 욕망을 훈련한다.

그래서 음악과 영화는 세상의 본질을 설명하기 전에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을 가르쳐 왔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 — 질서와 생명의 미학

성경이 말하는 아름다움은 다르다. 시편 150편은 이렇게 끝난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여기서 '찬양하다'는 히브리어 הָלַל (할랄).할렐루야의 어근으로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존재 전체를 드러내어 그대상을 향한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혼란이 아니라 질서이며, 파괴가 아니라 생명이며, 소비가 아니라 헌신이다.

하나님의 미학은 인간을 부추기지 않고, 인간을 세운다.

그래서 참된 아름다움은 사람을 중독시키지 않고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그래서 그런가?

감각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소위 건전한 문화 예술적 방향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오늘의 성문화 — '해방'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규범

대중문화가 생산하는 가치는

탈 권위와 탈 가치에 대한 예술적 방향을 '진보적이다'라는 새로운 훈장을 수여했다.


최근 영화·드라마·를 보면 특정한 경향이 분명히 드러난다.

기존 가족 질서를 해체하는 서사

성별을 유동적 정체성으로 해석하는 이야기

성적 경계를 넘는 인물을 ‘용기와 관용이 가득한 주인공’으로 그리는 설정

그리고 그들의 사회화와 성장의 이야기들은 종종

'새로움에 대한 도전'

'소수자의 목소리'

'문화적 진보'라는 이름으로

공적 지원과 제도적 후원을 받는다.

그래서 성이 단순한 관계성을 표현하는 언어를 넘어서 정치적. 문화적 상징이 된 것이다.



성은 왜 문화의 전면에 등장하는가?

역사적으로 성은 언제나 문화의 최전선에 등장해 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성은 인간의 가장 깊은 층위—정체성, 욕망, 관계, 몸—을 동시에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을 재정의하면 인간 전체를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오늘의 성문화는 말한다.

"정체성은 선택이다."

"몸은 의미를 부여하는 도구다."

"경계는 억압이다."


이 흐름 속에서 성은 더 이상 책임을 요구하는 관계가 아니라 자기 서사를 드러내는 무대가 된다.

문제는 이 변화가 도덕적 타락의 문제 이전에 인간 이해의 문제라는 데 있다.


성경이 보는 성 — 금기 이전에 ‘질서’

성경은 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을 아주 깊고 신성한 언어로 다룬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4)

여기서 "한 몸"은 히브리어 אֶחָד (에하드), 는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하나 됨이다.

새로운 존재 상태로 변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질서는 생명이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구조다.

그런 생명의 그릇이 인간의 둥지로서 바른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다.



오늘의 성 담론이 남긴 질문

오늘의 문화는 성을 해방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질문을 남긴다.

왜 관계는 더 불안정해졌는가? 왜 육체의 친밀함은 늘었는데 외로움은 깊어졌는가?

왜 성정체성은 자유로워졌는데 성적인 불안은 줄지 않는가?

성은 무한히 확장되었지만 그만큼 의미는 얇아졌다.

성은 표현의 자유가 되었지만 사랑을 견디는 힘은 약해졌다.

이것은 개인의 실패가 아닌 문화적 구조의 결과가 되었다.


신앙인의 태도 — 거부도, 추종도 아닌 '분별'

기독교는 성문화를 향해 돌을 던지지도 않고, 무비판적으로 따라가지도 않는다.

다만 신앙은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가?

아니면 더 많은 정체성의 불안을 만드는가?

신앙의 순수함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침묵이 아니라
무엇을 중심에 둘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선택하는 용기인 것이다.


예술은 욕망을 키우거나, 질서를 회복한다

예술은 성을 통해 인간을 소비하게 만들 수도 있고, 인간을 존엄하게 다시 바라보게 만들 수도 있다.

복음은 성을 관계와 책임, 생명의 방향으로 되돌린다.

그래서 복음이 스며든 예술은 더 자극적이지 않아도
더 깊은 울림을 만든다.


묵상

나는 무엇을 '진보'라 말하는가?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을 해체하는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복음은 시대를 거슬러 다시 묻는다.

"이 이야기는 끝내 인간을 어디로 데려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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