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3장 이어령! 철학을 넘어 복음으로

(복음과 문화의 변화)

by 향상

"알지 못하고 섬기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라."

— 사도행전 17:23

생각이 너무 많은 시대 그래서 중심이 흔들리는 시대.

감각이 출렁이는 시대 그래서 분별이 어렵고 약해진 시대.

복음은 그 한가운데를 다잡아 이끌어 중심을 바르게 세우는 힘이다.





사상은 언제나 질문을 만들지만, 답을 주지는 못한다

아테네는 고대 세계의 지성의 수도였다.

철학, 예술, 정치, 종교가 모두 그곳에서 태어나고 다듬어졌다.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스토아의 이성 윤리, 에피쿠로스의 쾌락 철학이

거리와 광장, 학당과 토론장에 넘쳐났다.

아테네 사람들은 질문에 익숙했다. 그런 도시를 향해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덴 사람들이나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롭고 특이한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아니하더라." (행 17:21)


지성은 넘쳤지만, 존재를 붙드는 답은 없었다.

아테네는 가장 똑똑했지만, 지성적 갈망으로 가득한 사상이 출렁이는 불안의 도시였다.


바울은 왜 아레오바고로 올라갔는가

아레오바고는 단순한 언덕이 아니었다.

그곳은 철학의 심문 대였고 사상의 검증소였으며 새로운 종교가 허용될지 판결하는 문화 법정이었다

바울은 그 자리에 설교자로 올라가지 않았다.

논쟁가도, 문화 파괴자도 아니었다.

그는 해석자로 올라갔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행 17:22)

복음으로 균형 아레오바고 언덕 2026-01-10 100320.png (아레오 바고 언덕- 오른쪽 돌판에 바울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아레오바고 언덕위 전경 2026-01-10 100646.png (아레오바고 언덕 위 전경-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 테스가 BC399년 이곳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여기서 "종교성"은 헬라어 δεισιδαιμονία (데이시 다이모니아).

신을 두려워함

초월을 향한 불안

의미를 찾으려는 강박

바울은 그들의 사상을 드러내었다. 조롱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존재의 갈증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때 그의 삶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기에 애정이 남달랐을 것이다.


'알지 못하는 신' — 지성이 만든 가장 정직한 고백

바울은 도시 한가운데서 하나의 제단을 발견한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행 17:23)

이 제단은 아테네 철학의 실패가 아니라, 아테네 지성의 정직한 고백이었다.

모든 것을 설명하려 했지만 설명되지 않는 무엇... 신을 부정했지만 완전히 지울 수 없었던 초월,

이성으로 다다를 수 없는 영역 그래서 그들은 '모르는 신'을 남겨 두었다.

바울은 그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너희가 알지 못하고 섬기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라."

복음은 무지를 나무라거나 비웃지 않는다. 무지 속에 남아 있던 열린 문으로 이끌어 간다.


철학을 부정하지 않고, 철학을 넘어서는 복음

바울의 설교는 놀랍다.

그는 성경 구절로 시작하지 않고 율법도, 예언자도 인용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말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 하며 존재하느니라." (행 17:28)


이 문장은 그리스 시인 아라투스(Aratus)의 표현이다.

바울은 철학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의 자리로 이끌었다.

예수님이 율사들을 향해서 복음은 율법을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을 완성하려 한다고 말했던 것과 겹치는 부분이다.


철학은 묻는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복음은 답한다. 너는 창조되었다. 너는 하나님 안에 있다. 너는 부활을 향해 간다

철학은 인간을 중심에 둔다. 복음은 하나님을 중심에 둔다.

그래서 복음은 지성을 버리지 않고 관통하여 끝내 지성이 도달해야 할 영성의 자리로 끌어올린다.


부활 — 아레오바고가 침묵한 지점

설교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한 단어를 꺼낸다.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느니라." (행 17:31)

그 순간, 분위기는 갈라진다. 어떤 이는 조롱한다. 어떤 이는 다음을 기약한다. 극소수만 믿는다.

왜인가?

부활은 철학이 가장 두려워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헬라 철학에서 육체는 감옥이고, 구원은 영혼을 탈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말한다. 하나님은 육체를 버리지 않으셨고 세계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부활은 새롭게 등장한 이성의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이다.

그래서 복음은 철학의 경쟁자가 아니라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유일한 빛이다.

그런 구조가 불편한 사람들이 하나 둘 바울을 떠나게 된 것이다.


오늘의 아레오바고 — 지성은 넘치고, 의미는 사라진 시대

오늘의 아레오바고는 어디인가?

대학 강의실 문화 담론의 현장 유튜브 지식 채널 철학·심리·과학 담론의 무수한 무대가 있다.

오늘의 사람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똑똑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어느 시대보다 의미에 굶주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하는 신'의 영역을 남겨두었다.

성공

자아실현

첨단의 기술

감정의 진실성


이어령 — 지성에서 영성으로 생명을 만나다.

이어령 교수는 한국 현대 지성의 정점이며 상징이다.

그는 문학·철학·기호학·문화비평을 통섭한 인물이며 그 모든 것을 누구보다 더 정교하게 분석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또 한 번 의외였다.

"나는 평생 의미를 말했지만 생명을 붙들지 못했다. "

알고 있었으나 그러나 살아내지는 못한 지성이었다고 자기를 진술했다.


딸의 죽음 앞에서,
외손자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 속에서
지성은 더 이상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은유가 무너진다." 말했다.


그래서 그는
'설명하는 신'이 아니라
'살리는 신'을 찾기 시작했다.

더 이상 지성으로는 견딜 수 없는 시간을 맞이하며 비로소 영성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그의 신앙 고백은 확정적이지 않았으며, 그의 믿음은 시처럼 조심스러웠다.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 묻은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이어령 -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중 일부 )


추상이 무너진 자리에

그는 철학을 문학을 신학으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깊이 통과하여 구원에 도달케 된 사람이다.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이심이라" (사도행전 17:25)

그렇게 그가 끝내 붙든 단어는 생명의 '부활'이었다.


신앙인의 문화적 지성 — 도피가 아닌 해석

기독교는 지성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성을 구원의 주인으로도 세우지 않는다.

대신 읽고 해석하고 복음으로 연결한다

바울처럼 사상의 언어를 이해하되, 존재의 답은 복음으로 건넨다.

이것이 아레오바고적 신앙이다.


묵상

나는 무엇으로 이 시대를 설명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으로 이 시대를 구원하려 하는가?

지성은 질문을 만든다.

복음은 존재를 살린다.

복음은 지금도 사상의 한복판에서 조용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알지 못하고 섬기던 그것을, 이제는 알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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