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2장 예수와 가이사 — 충성과 통치의 경계

(복음과 정치의 변화)

by 향상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는 것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마태복음 22:21


예수께 던져졌던 가장 정치적인 질문?

이 질문은 신학적 토론이 아니었다. 정치적 질문을 가장해서 예수께 던진 함정이었다.

"당신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대, 이 질문은 단순한 세금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충성의 대상을 말하라고 요구받는 질문이었다.

"옳다"라고 말하면 그는 로마 제국의 협력자가 되어 유대인에게 매국노요 구원자로서의 흠결이 된다.

"옳지 않다"라고 말하면 로마 제국의 황제를 향한 반역자로 체포된다


이 질문을 던진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상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그분이 어느 권력에 속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답변을 통해 이래도 저래도 어려움을 피할 길 없도록 올무를 놓았다.

정치적 질문은 곧잘 대중을 향해 이렇게 어렵게 질문의 형식을 나열하다.

그렇지만 "너는 누구 편인가?"라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단순한 질문이다.


가이사는 누구인가 — 권력의 신격화

'가이사'는 단순한 황제의 이름을 넘어서 그 자체가 권력의 상징이다.

로마 제국에서 가이사는 정치 지도자이자 군사 통수권자이며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었다.

동전에 새겨진 가이사의 얼굴 옆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신의 아들, 가이사"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단순한 재정 행위가 아니라 그 주권을 인정한다는 상징적 행위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세금 문제는 늘 신앙 문제였다.


예수의 대답 — 회피가 아닌 새로운 정의

예수님은 동전을 요구하신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사람들은 대답한다.
"가이사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기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대답은 중립도 아니고 타협도 아니다. 예수님은 권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권력을 절대화하지도 않는다. 그분은 충성의 영역을 두 개로 나누지 않았다.

오히려 충성의 위계를 재정렬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앞에 놓인 정치적 질문에 상대를 어지럽게 하는 명쾌한 대답을 내놓았다.


충성의 경계 — ‘궁극적’ 대상은 누구 인가?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바치다’이다.

헬라어 원문에서 “바치다”는 단어는 ἀπόδοτε (아포도테) ‘돌려주다’, ‘마땅히 반환하다’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다.

가이사에게 속한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어라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것은 결코 가이사에게 넘기지 말아라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이 하나님께 속하는가?

예수님은 직접 말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흐름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 생명

- 양심

- 예배

궁극적 충성 이것들은 그 어떤 국가도, 그 어떤 이념도, 그 어떤 권력도 요구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영역이다.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는 '가이사'

오늘 우리는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가이사들은 존재한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에게 묻는다.

"너의 최종 충성은 어디에 있는가?"

문제는 이 가이사들이 스스로를 신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말한다.

"나는 현실이다."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은 시험대에 오른다.



두 얼굴의 가이사, 충돌하는 패권

오늘날 우리 앞에 나타난 '가이사'는 두 가지 상반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적 패권 다툼을 벌이며 우리에게 양자택일의 충성을 요구한다.


첫째는, 공산 사회주의 '우상이 된 국가'라는 가이사의 모습이다.

북한이나 일부 공산주의 체제에서 볼 수 있듯, 종교의 자유를 말살하고 있다.

국가 권력 자체가 신의 자리를 꿰어 차고 있는 형태다.

이 가이사는 "하나님의 것"이란 영역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간의 생명과 양심, 예배까지 모두 국가에 바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 후 통치자는 자신이 국가 또는 신이 되어 가이사의 형상, 신의 형상으로 개인의 영혼을 완전히 지배한다.

.

둘째는, 자유진영 '현실이라는 이름의 우상'인 가이사다.

우리가 사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속 가이사입니다.

이 가이사는 겉으로는 "하나님의 것"을 인정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자본과 효율, 안보와 안락함의 논리로 신앙을 사소한 취미의 영역으로 밀어내고 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자유지만, 너를 지켜주는 현실의 힘(돈, 법, 시스템)을 인정하라고 밀어붙인다.


박해보다 무서운 '어쩔 수 없음'이 우리의 주권을 야금야금 빼앗아 간다.

지금 국제 사회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패권 전쟁은 결국 이 두 종류의 가이사의 싸움이다.

누군가는 체제의 우월성을 말하고, 누군가는 자유와 민족의 번영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패권의 승자가 누구냐에 매몰되어 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어떤 체제와 권력도 결코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는 본질적 선언이 필요하다.

공산주의의 억압이든 자유주의의 방종이든, "하나님의 영역"을 넘보는 순간 우리는 흔들린다.

예수님처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고 말하지 못하게 된다.



예수의 정치성 — 체제 밖이 아니라 그 위

예수님은 정치를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정치 안으로 들어가 권력을 차지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정치의 바깥이 아니라 정치의 위에 서셨다.

그래서 그분은 가이사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동시에 가이사를 대적하는 방식으로도 행동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기독교 정치 윤리의 핵심이다.

- 맹목적 복종도 아니고

- 무조건적 저항도 아니다

- 최종 충성의 보존이다.


신앙인의 질문 — 우리는 어디까지 바칠 것인가

이 장은 정치 참여의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 나는 무엇까지는 기꺼이 바칠 수 있는가

- 그리고 무엇만큼은 끝내 지켜야 하는가

예수님은 가이사의 동전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그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으셨다.


묵상

나는 국가와 제도에 협력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들에 나를 맡기고 있는가?

가이사는 질서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구원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오늘 나의 충성은 어디까지 가이사에게 가 있고, 어디서부터 하나님께로 속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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