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이름들과 기억에 대하여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by 고수진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국내에 1998년에 출판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20년 전인 1978년에 쓰인 작품이다. 그해 서른셋이었던 파트릭 모디아노는 이 작품으로 공쿠르상을 받았다. 아마도 이동진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 늦었지만, 이제야 읽게 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좋았던 것은 문체였다.

간결하고 어렵지 않은 문장들. 그러면서도 서정적이고, 깊은 여운을 남기는 장면들.


서늘함과 따스함, 그리움, 슬픔과 외로움, 두려움과 공포.

정처 없고 쓸쓸하고, 눈물 나지 않는데도 내내 슬픔이 배어 있는 아름다운 문장들. 나는 이 책을 다 읽고도 마음이 붙잡혀 있었다.


이 소설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기 롤랑이라는 남자는 기억을 잃었고,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 못 한다. 그는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오래된 이름들과 사진, 전화번호부 속의 주소들, 이미 죽었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간다. 스티오파, 게이 오를로프, 드니즈, 프레디, 페드로, 맥케부아, 지미 페드로 스테른. 자신이 누구일지 모른 채 그 이름들을 쫓아 사람들의 기억 조각을 모은다.


읽는 내내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분명 조용한 소설인데도 내내 감정이 일렁거렸다.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슬펐다.

궁금하고 공허하고 쓸쓸했다.

왜 그랬을까.


아마 이 소설이 어떤 사건을 극적으로 보여주기보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의 흔적과 사람들 마음속에 남은 상처를 더듬기 때문일 것이다. 기가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다 말하지 못한다. 어떤 시절은 너무 가슴이 아파서 입 밖에 꺼낼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 모든 이야기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저 “참 슬펐어.”라고만 말한다. 그 한마디 안에 다 담아지지 않은 상실과 공포, 후회와 죄책감, 그리고 끝내 회복되지 않는 시간이 함께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소설을 읽으며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자기 자신이 되는 걸까.


기 롤랑은 기억을 잃었지만 어떤 순간에는 과거가 사진처럼 정확하게 불쑥 솟아오른다. 어떤 장소에 갔을 때 느껴지는 설명할 수 없는 절망과 기대, 불안. 그것은 이미 머릿속에서는 잊었어도 몸 어딘가에는 기억이 남아 있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정체성이란 이름이나 서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감각과 상처, 잔상 같은 것들 속에도 존재하는 걸까.


동시에 반대로도 묻게 된다.

나를 기억할 수 없다면 나는 누구일까.

나를 기억해 주는 이가 없다면 나는 누구일까.


이 소설이 더 아프게 다가오는 건, 단지 한 남자의 기억상실을 다루기 때문이 아니라, 한 시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라지게 만들었는지 가만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순진하고, 잃어버리고, 끝내 되찾지 못한 채 살아간다. 또 어떤 이들은 교활하고, 빼앗고, 돌려주지 않고, 그대로 묻어버린 채 살아간다. 왜 어떤 삶은 그렇게 지워지고, 어떤 사람은 그 지워짐 위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걸까. 또 전쟁은 대체 누가, 누구를 위해 벌이는 것일까. 사라지고 싶지 않았는데도 사라지게 만든 시대는 누구를 탓해야 하는 걸까.


읽는 동안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사건보다 분위기였다.

눈 덮인 밤, 늦게 떠오르는 불길한 예감, 이미 너무 늦어버린 순간들, 되돌릴 수 없는 선택, 그리고 그 이후에 남는 긴 공백. 모디아노는 그것을 격렬하게 쓰지 않았다. 모든 문장이 담담하고 조용하다. 그래서 더 깊은 슬픔을 만든다.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데 마음속엔 슬픔이 차올랐다.


나는 책을 덮고도 한참 생각했다.

선함과 악함은 언제나 분명히 갈라져 존재하는 걸까.

정체성은 언제부터 생기는 걸까.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는 것이란 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까.


이 책은 설명해 주는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쉽게 설명되지 않는 감정과 질문들 속으로 데려가는 소설에 가깝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무엇이 진실이었는지 전부 알게 되었는데도, 마음은 오히려 더 무거워진다. 누군가의 이름과 흔적을 따라 가까스로 자신을 찾았을 때, 이미 너무 많은 것이 사라진 뒤라는 너무 슬픈 현실을 보여준다.


깊은 여운을 주는 책이었다.

다른 모디아노의 소설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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