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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팔우정 해장국거리

by 높은구름

기숙사 생활을 하며, 주말에 잠시 들르러 오는 고3 아이의 아빠에게 주말은, 그것도 놀토일 때는 오리엔테이션이 무너진다.

어디에 있어야 할지, 뭘 먹어야 할지, 그렇다고 아내가 미운건 아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더 미안할 뿐이지.


하여 무작정 별로 넣을 것도 없는 빛바랜 작은 배낭에 쓸모도 없는 가지가지 물건들을 쑤셔 넣고, 버스 정류장에서 가장 먼저 오는 버스를 타고 앞유리창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조금은 여유로워진 토요일 창밖 세상에 눈을 맞춘다.

자가용을 운전할 때면 늘 경마용 말의 눈가리개처럼 앞만 보게 되어 수많은 것들을 모르고 지나가 버리지만, 버스를 타면 앞도 옆도 다 볼 수 있어 늘 다니던 길도 새로운 여행지처럼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어 참 좋다.

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가 있어 더 멀리까지도 새롭게 다가온다.

신경 쓸게 많은 운전에서 벗어나니 머릿속 뇌세포들도 여유가 생겨 생각도 고민도 순조롭게 넘어가지니 참 좋다.


오늘은 경상북도 경주다.


2번의 환승으로 느리지만 착실하게 버스는 경주 팔우정 거리에 도착했다.


30년 전 경주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던 친구가 방학 때 밥을 사준 곳이 여기 팔우정 해장국 거리였었다.

왜 그 방학 때 경주까지 와서 그 친구와 여기 팔우정 해장국을 함께 먹었는지, 주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는지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그 친구가 사 준 선지가 들어간 따뜻하고 맛있었던 그 느낌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음식을 대접한다는 건 이렇게 소중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30년이 지났는데도 기억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 이후로 한 번도 오지 못한 곳에 다시 와서 혼자 똑같이 선지 해장국을 먹었다.

물론 내가 변한 건지 이 해장국이 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달라져 있어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그 친구의 따뜻한 마음은 그대로 느껴져 좋았다.


생각하는 거지만 누군가에게 음식을 대접한다는 건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인 식욕을 건드려 그 사람에게 좋은 쪽으로 각인시킬 수 있는 강력한 방법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도 오랫동안 사라지지도 않는 것 같고.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배부른 여유로 졸다가 자다가를 목이 아프게 하다 보니 어느새 집 앞 버스 정류장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 가는 길에서 하늘을 보니, 단풍도 아직인 초가을 저녁놀이 서쪽 산을 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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