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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May 05. 2023

김천 직지사에서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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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염없이"


이 말이 화두(話頭)가 되었다.


딱히 국어사전에도 '하염'에 대한 정의는 보여주지 않았다.


딱하게도 아내와 딸, 둘이서 모처럼 여행을 가는 날 하염없이 비가 온다.

늦은 봄날의 그 좋은 날들을 다 보내버리고, 굳이 이렇게 하염없이 내리는 날을 잡아 힘겹게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웃으며 여행을 떠나니 다행이긴 하다.


하염없이 내리던 비도 잠시 그친다.

늦은 봄의 향기가 온통 비에 젖어 가볍게 떠오르니 우울했던 걱정도 지워버린다.

비에 숨 죽이던 새들도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높은 음으로 서로를 부르고서는 조용한 절집을 토닥거리고 있다.


여기는 하염없이 오는 김천 직지사(金泉 直指寺)다.

눈부시게 따가운 해도 없고, 시끄러운 말소리조차 보이지 않는 곳, 어쩜 아직 피지 못한 늦은 봄의 꽃들이 피어오르는 소리마저 보일 듯 고요하다.

비록 새들의 높은 지저귐 소리에 반쯤 가려져 들릴 듯 말 듯 하지만 말이다.

꽃 피는 소리에 놀라서 새들이 지저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새들도 꽃들도, 비도 하염없이 제 일들을 하고 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시선

하염없다는 화두를 가슴에 안고, 화려한 옷과 화관(花冠)을 쓴 직지사 관음전(觀音殿)의 관음보살(觀世音菩薩)한참 동안 바라며 함께 하고 있노라니, 하염없다는 건 꼭 해야 할 스스로의 일을 최선을 다해하는 게 아닐는지 싶은 생각이 스친다.


하여 여기 많은 이를 굽어 살펴야 하는 관음보살의 끝없는 미소와 닮아 보인다.


하염없다는 어쩜 비, 바람, 꽃, 관음보살 들처럼 그 나름의 이유들이 있어 그렇게 하염없이 무언가가 되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한자를 쓰는 자연(自然)과도 많이  닮아 보인다.


비는 내려야 하고, 새는 지저겨야 하고, 꽃은 피어야 한다. 그리고 음보살은 여린 중생을 하염없이 구제해야 하는 게 자연스럽다.

다 제 뜻이 있는 거다.

다 제 뜻이 있는거다

비도, 꽃도, 새들도, 그리고 새봄데도 옅은 바람에도 떨어지는 나무 잎사귀 한 장도 다 제 뜻이 있었던 거였다.


그렇게 하염없이 내리던 비도, 올봄 새로 난 여린 잎사귀를 기던 바람도 잠시 잦아들었다.


하염없이 비가 오고 나니, 푸른 하늘은 볼 수 없었지만, 새소리는 더 또렷이 들렸다.

또, 3살쯤 되어 보이는 귀여운 여자아이 부르는 사랑 가득한 엄마 목소리도 더 정겹게 들렸다.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하염없다'는 그냥 '하염없다'였다.


비는 아직도 제 뜻을 다하지 못했는지 또다시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새들도, 꽃들도, 관음보살님도,

그리고 나도...


다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

...


홀로 한참을 관음전에서 빗소리를 듣고 있다.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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