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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Jun 06. 2023

부산 범어사에서

친구(親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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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도 넘은 것 같다.

의과대학 예과 2학년 시절.


제법 대학생활도 익숙해지고 중간고사도 막 끝난 그 시기.

그렇게까지 친하지도 않은 옆자리 여자친구를 꼬드겨 우리는 번호도 기억나지 않는 처음 보이던 버스에 올라탔었다.


이유도 없는 일탈을 했다.


아마 예과과정 중 참 재미없었던 수업이었을 거라 변명해 본다.

하지만 늘 그렇듯, 하필 그날 수업은 그 과목의 가장 중요한 수업이었고, 우리는 자칫하면 본과로 진급하지 못할 뻔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둘 다 무사히 올라간 걸 보면 그날 우리가 간 그곳에서 무언가 정성을 다 해 빌었던 그 친구 덕이라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 버스는 그리 멀지 않은 이곳 절집으로 땡땡이를 치고 제법 더위가 시작되는 6월 초의 젊은 청춘들을 그렇게 여기까지 오게 해 주었다.


30년 넘은 세월을 그렇게 바쁘게 살다 보니, 안부인사마저 소원해졌지만, 그 친구도 그날 이곳을 분명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된다.


여기는 부산 금정산 범어사(金井山 梵魚寺)다.

금정산 범어사

금빛 물고기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산속 우물에서 놀았다는 금정산(金井山)에 있는 아주 큰 절이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와 연결되어 있는 산이라서 더 정겨운 산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교가에 무슨 무슨 산 정기받아로 시작하는 것처럼, 대학교 교가에도 이 금정산이 나오니 더욱더 정겨울 따름이다.


마침, 서울에서 큰 스님이 오셔서 큰 법회를 하는 중이라, 신도들이 참 많다.


그래도 다들 참 조용히 인사하는 모습이 편안하다.

그 시절, 그 친구와 버스에서 내려 조금 올라오니, 입장료를 내는 곳이 있었다.


우린 그 얼마 되지도 않은 입장료를 내지 않기 위해 지금은 산책길로 변한 숲 속 길을 빙 돌아 공짜로 들어갔던 기억이 잊히지가 않는다.


지금은 입장료가 무료라서 그냥 큰길로 들어가도 되지만, 그 친구를 생각하며 잘 만들어진 숲 속 명상의 길 따라 걸어가 보았다.

조금 힘들어질 때 즈음, 범어사는 여러 문들을 내 보인다.

속세힘들고 아픈 마음들을 내려놓으라며 길을 연다.

천왕문                                                                    불이문

그날처럼 오늘도 처음 들른 곳은 공양간(間)이다.

그날 그 친구와 여기 이 절에서 먹었던 비빔밥을 오늘 또 그날처럼 맛있게 먹고 있다.

입장료도 내지 않고, 수업까지 땡땡이를 치고 먹는 절집 공양이 왜 이렇게 맛있는지는 그때도 오늘도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날처럼 오늘도 고기 한점 없는 비빔밥 한 그릇과 국 한 사발이 이리넉넉하고 고마운지.

오늘은 바나나도 하나 더 받았다.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공양을 받아, 또 고마운 마음에 밥 한 톨 남김없이 먹고 나니, 포만감이 절로 기분 좋은 졸음을 몰고 온다.

어젯밤 본격적인 갱년기로 깊이 잠들지 못함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말이다.


푸른 금정산을 등지고, 더 뒤로 높은구름이 환하게 떠 더 푸른 하늘을 넉넉히 두른 대웅전을 바라보자니, 사방이 다 조용하다.

보통 대웅전(大殿)에서 바라본 부처님 시선의 대웅전 앞산이 참 좋은데, 여기 범어사에서는 대웅전을 우러러 올려보는 범인(凡人)의 시선이 더 마음 따뜻해진다.

금정산도, 구름도, 하늘도 뭐 하나 허투루 비치지 않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30년 전에 보았던 똑같은 하늘을 높게 날던 매 한 마리는 보이지 않아 아쉽지만, 그 자리를 까마귀들이 고요하기만 한 절집을 깨운다.


넓은 절집이라 여기저기 돌아보다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모신 독성각(獨聖閣)의 문에 새긴 문양이 너무 예뻐 나반존자께 인사하는 것도 까먹고 문살만 하염없이 바라다, 그때도 그랬던 기억이 나 혼자 또 한참을 웃고 앉아 있었다.

독성각(獨聖閣) 문에 새겨진 문양

절집 문이 이렇게 예뻐도 되는 거냐던 친구의 미소가 또렷이 기억난다.

독성각(獨聖閣) 문에 새겨진 문양

근엄하신 나반존자도 웃어 주시는 듯 그렇게 독성각에 한참을 있었다.


아주 아주 큰 절이지만, 작은 건물들이 여러 개로 이루어져 내게는 편안하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듯하다.


또 작은 옛 기억들을 되새겨 주는 듯도 하다.


여기서 그냥 우연히 만난 스페인에서 온 내 또래 두 여행객에게 여기서 산 작은 풍경(風磬)을 선물로 주니, 연신 고맙다며 환한 미소를 보내준다.

내려갈 때 계속 풍경 소리를 내며 좋아한다.

그들도 나를 여기서 만난 좋은 친구로 기억하리라 생각하니, 내가 더 고마워진다.


서울에서 온 큰 스님의 법회가 끝나고, 오후가 되니 절집은 조금 더 한산 해졌다.


내일 그 친구에게 그때, 30년도 더 넘은, 하늘이 오늘처럼 푸르던 그 시절, 여기 범어사에 온 걸 기억하는지 물어봐야겠다.

아니, 그때 참 좋은 시절이지 않았니 하고 물어야겠다.


저 위 절집 마당에서, 아직 그 스페인 친구들의 풍경소리가 조용한 절집 마당을 더 조용히 머물고 있다.


30년 전 나와 그 친구의 미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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