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햇살에도 차갑게 흔들리는 풍경소리는 바람 한점 없는 허공을 신기하게 감싸고 그 특유의 맑은 소리를 적신다.
절집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가맑은 여기는 팔공산자락의 영천(永川) 은해사(銀海寺)이다.
팔공산 은해사(八公山 銀海寺)
그 깊은 의미를 알지 못하는 애절한 염불소리에도 마음이 잔잔해짐은 그 큰 뜻 그대로임을 금방 깨닫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욕심을 버리고 그저 내가 없음(無我)을 깨닫기 바라던 부처의 깊지만 단순한 이치를 어찌 이렇게도 알지 못하는지, 이런저런 바람들을 줄줄이 입 밖으로 되뇌니 부끄러움이 또 한참을 흔들고 간다.
욕심을 버리라 했건만 욕심을 더 내고 있으니,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멀었음을 또 깨닫는다.
그러고서 느껴지는 그부끄러움은 끝이 없다.
그래도 그렇게 그 바람들을 말하고 나면, 또 한 번 더 내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보니 듣고 계신가 보다 하며 소리 없는 미소가 또 그만큼 오랫동안 흐른다.
나이 많은 스님의 너무도 또렷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끝나니, 절집은 또 끝 모를 고요가 숨소리마저 시끄러운 소음으로 만들어 버려 조심스러워진다.
지난 부처님 오신 날 달아놓은 오색 연등(燃燈)들이 절 마당 가득 눈길을 사로잡는다.
모두들 색색의 그 연등 아래로 연신 사진 찍기에 바쁘다.
연등(燃燈)
한껏 욕심 낸 오색연등의 그 알록달록 예쁜 색들도 장마가 오기 전 타오르는 햇빛을 받고 나니 절마당에 소박한 그림자들만 새겨놓았다.
절 마당의 연등 그림자.
그토록 어렵게만 느껴지던 무아(無我)의 그 큰 뜻을 헤아릴 리 만무하지만, 그 색색의 연등들이 그렇게 똑같은 모양을 하면서도 절마당 전체를 가득 메우고서는 단지 색만 사라져 버리니, 말하지 않아도 없음[無]과 빔[空]의 그 큰 뜻에 조금은 다가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겨 다행이다.
없음은 없음이 아닌 또 다른 채움이 아닐까 싶다.
그래야만 허무하지 않으니 말이다.
절 마당의 그 많은 예쁜 연등색들은 전부 사라졌지만 분명 많은 것들이 또 채워져 있다.
그림자마저 없었다면 그저 허무함만 남을 것 같아 슬펐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로 인해 그 색들의 변화는 없음의 허무함이 아닌 소박하지만 공간의 채워짐으로 다가온다.
또 다른 아름다움을 가르쳐준다.
무아(無我)가 그저 없음이 아니며, 공간의 채움이라고 절마당 가장 낮은 곳에서, 짓이겨지면서 가르쳐주는 게 정말 맞는가 보다.
절마당의 그 연등에 의한 그림자가 너무 예쁘게 그려져 연등의 그 오색찬란한 색들을 더 화려하게도 만들어 주는 듯하다.
무아(無我)는 없음이 아님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내가 다 이해하기에는 무리이기도 하다.
어쩜 무아는 없음이 아니라 절 마당의 그림자처럼 끝없이 변화해서 채우라는 말이 아닐는지, 욕심을 욕심으로 놓아두지 말고 오색찬란한 연등처럼 절마당을 채우듯 욕심을 나를 채우는 그런 무아의 수단으로 쓰라는 말은 또 아닐는지.
많은 숙제를 안고 나오는 절집 앞 개울은 무심히 그 맑은 소리를 변화 없이 들려주고 있다.
한 없이 흘러가버린 개울물은 지금 내 귀에 들리는 그 개울물은 분명 아닐진대, 어쩜 변한 것 없이 여전히 똑같은 맑은 그 소리를 들려주는지 신기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