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처럼 너무나 달콤한 달고나는 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간식이다. ‘설탕보다 달구나’에서 유래했다고 하기도 하고, ‘달구나’라는 말에서 유래된 걸로 보기도 한다. 달고나는 여러 가지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며 다양한 이름을 가졌는데, “뽑기, 띠기, 떼기, 찍어먹기, 똥과자(누런 색깔과 불량식품이라는 부정적 이미지에서 기인), 쪽자(국자를 의미)”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달고나를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는지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겨진 사항은 없지만, 1960년대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한 걸로 추정된다.
문학작품 중에 달고나가 나오는 “봉순이 언니”라는 소설이 있다. 1960년대 후반 가난한 시대에 식모살이를 하는 여자의 기구한 삶을 다룬 이야기다. 1960년대 시대상도 많이 반영되어 있는데 공지영님의 소설 “봉순이 언니"에서는 주인공 소녀가 달고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아마도 많은 시간을 성진 만화가게나 또복이네 또뽑기 집에서 양은으로 만든 국자에, 달고나라고 불리우던 하얀 덩어리나누런 설탕을 녹여먹으며 보냈다."
- 소설가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 중
소설에서처럼 달고나는 1960년대 먹거리가 변변치 않았던 시절에 아이들의 좋은 간식거리였다. 1950년대인 한국전쟁 직전부터 있었다고도 하는데 그때는 널리 대중화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1950년대 초는 설탕을 전량 수입할 때라 매우 비싸고 귀한 것이었고, 1953년 11월 제일제당에서 “중백당”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국산 설탕을 만들었는데 이때 설탕은 몸살이 나거나 밥맛 없을 때 먹는 보약처럼 취급되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달고나는 설탕이 주원료로 당시 과자 산업이 발달하지 못해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에 설탕에 소다가 가미되어 만들어내는 달콤한 캐러멜 맛으로 인기를 끌었다. 1962년은 쿠바 사태(미국을 목표로 한 쿠바의 미사일 기지 건설 움직임에 미국이 쿠바와 통하는 모든 길을 봉쇄한 사건)로 설탕의 주원료인 사탕수수를 구하기 힘들어 설탕의 품귀현상 일어났다. 이때 설탕 값이 올라 61년 600g에 25원 하던 도매가격이 63년 4월 240원으로 10배 오르기도 했다.
덩달아 1960년대 초반에는 설탕 사재기 열풍으로 설탕이 재테크 수단이 되기도 했고, 귀한 물건으로 명절 때 최고의 선물 중 하나였다. 따라서 맛도 맛이지만 설탕에 포도당, 소다 등을 첨가해 설탕을 적게 사용하는 방법도 나오게 되고, 어떤 곳에서는 소다 외에 물을 많이 넣어 빵처럼 부풀려 먹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달고나는 설탕의 생산량이 증가하고 가격도 싸진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대중화한 걸로 추정된다.
달고나(뽑기과자)가 언급된 최초의 신문 기사는 놀랍고 안타깝게도 달고나를 많이 먹은 어린이가 숨졌다는 1971년의 동아일보 기사다.
길거리에서 파는 설탕에 소다를 탄 “뽑기과자”를 자주 사 먹은 어린이가 소화장애에 염증이 겹쳐 숨졌다. 서울 서대문 수색 국민학교 장모군이 구토와 설사를 하며 이틀간 앓다가 숨졌다. 장군을 치료한 수색동 김의원 의사는 “소다가 다량으로 장에 들어갈 경우 소화장애로 장에 염증을 일으킬 수 있고 어린애의 경우 악화되면 치명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 동아일보(1971.11.12), “뽑기과자 먹은 꼬마 절명”
지금은 간식거리가 많지만, 1960~70년대에는 이렇다 할 품질 좋은 과자가 많지 않아 비위생적이고 몸에 좋지 않은 재료를 과도하게 사용해 만든 불량식품이 기사처럼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다 사라지고 지금은 재미 삼아 만들어 먹는 추억의 과자지만, 달고나는 몇십 년 동안 어린 아이들의 맛나고 달콤한 간식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그런 공로(?)에도 불구하고 달고나는 지역마다 이름도 제각각, 만드는 방법도 따로따로, 과자로써의 제대로 된 정식 이름이나 대접 한 번 받지 못하고 흐르는 세월 속에 그냥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달고나는 불량식품이었지만 그냥 단순한 불량식품은 아니다. 수십 년 전 어려운 시절에 누군가에게 먹는 즐거움과 행복을 선사했던 조금은 착했던 불량식품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