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은 아주 오래전 석기시대 사람들에게는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농사짓기 이전부터 이어 온 배고픔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활과 화살의 등장은 사냥하는 방법을 크게 발전시킨다. 먼 거리에서 창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사냥이 좀 더 쉬워지고 위험이 덜해졌기 때문이다.
그 때와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의 전통 활인 국궁으로 활을 쏘면 화살의 속도가 초당 약 50~60m 정도 된다고 한다. 활이 있기 전에는 사냥감에 접근하다 놓치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대면해서 싸우는 방식이 사냥의 주된 방법이었을 것이다. 석기시대임을 감안해도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동물을 몇 초만에 화살로 맞춰 잡을 수 있게 되었으니 굉장히 획기적인 사냥 방법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석기시대의 활은 나무로 만들어져 긴 시간이 지나면 썩어 버려 몇 만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실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뼈나 돌로 만들어진 화살촉이나 동굴 벽화의 사냥하는 그림을 통해서 활과 화살이 만들어지고 사용된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활의 흔적은 기원전 6만 2천년경 남아프리카 동굴에서 발견된 뼈로 만든 화살촉이다. 기원전 15000~13000년 사이로 추정되는 프랑스 남서쪽에서 발견된 라스코 동굴벽화(Lascaux Cave)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활로 순록을 사냥하는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활을 사냥에만 사용했던 건 아니다. 다른 지역의 부족을 공격하고 사람을 죽이는 데도 쓰였다. 케냐 투르카나 호수 인근의 나타룩 유적지에서는 기원전 약 10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27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2016년 1월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고고학팀의 연구 결과다.
특히 10구의 유골에서는 둔기로 머리를 맞은 흔적과 화살촉 같은 뾰족한 걸로 목에 난 상처가 발견되었다. 손발이 묶여 죽은 사람, 돌칼에 찔린 체 죽은 사람 등 케임브리지대 고고학 연구팀은 지금은 사막이지만 당시 투르카나 호수 지역이 비옥한 땅이라 이 곳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 중 학살당한 사람들이라고 추정했다.
화살촉으로 쓰인 흑요석의 경우 나타룩 지역에서 드문 암석이라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쳐들어와 벌인 일이라는 데 힘이 실리고 있다. 다른 부족의 땅과 식량, 노동력을 빼앗으려는 정복 전쟁에도 활과 화살은 매우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1944년 덴마크 홀메고르 지방에서 2개의 활(환목궁)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약 7000년 전의 것으로 현재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활은 나무 하나를 그대로 둥글게 깎아서 만든 활이다. 동물의 힘줄이나 뿔과 같은 다른 재료를 사용해 만든 합성궁이나 여러 나무를 섞어 만든 복합궁보다 힘이 부족해 사정거리나 파괴력은 떨어진다. 하지만 그림이나 화살촉만이 아닌 실제 유물로 발견된 걸로는 가장 오래된 초기 형태의 활이다.
1991년에는 알프스 산맥 외치 계곡(Oetzi Valley) 해발 3200m 빙하에서 아이스맨 외치가 발견되었다. 기원전 약 2300년 전 석기시대인의 시신이 빙하가 녹는 과정에서 잘 보존된 미라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159cm 키에 46세의 남자로 추정되는 데 청동도끼, 돌촉으로 된 84~87cm 의 화살 14개와 182m가 되는 활(장궁)의 일부분이 같이 발견되었다. 왼쪽 어깨 뒤에 화살촉에 맞은 상처가 있지만 직접적인 사인은 사냥 중에 산에서 추락해 치명상을 입어 출혈과 쇼크로 사망했을 걸로 본다. 이 시기에도 활을 사용해 사냥과 전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활은 이후 여러 종류의 나무와 동물의 힘줄, 뼈 등을 활용해 복합궁과 합성궁으로 발전한다. 유효 사정거리 또한 초기 단궁이 45~90m였으나 180~270m 정도까지 늘어나고 정확도도 점점 향상되며 강력한 무기로 자리 잡는다. 기원전 500년경에는 그리스와 중국에서 최초의 석궁 개발되어 많은 연습과 훈련을 하지 않아도 활을 쏠 수 있는 병사들이 생겨났다.
중세 시대에는 칼, 창, 활이 주요 무기였는데 14세기 유럽 지역의 전투에서 활이 거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이때 등장한 철제 활은 갑옷을 뚫을 수 있어 총이 나오기 전까지 강력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철제 활이 아니더라도 얇은 갑옷을 뚫을 수 있는 위력을 가진 장궁을 개발해 더 간편하게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영국이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무기의 우위에 있어서라고 보기도 한다. 이후 초기 미흡한 성능에서 공격력이 많이 향상 된 총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활은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이름은 무슨 뜻일까? 옛 부여의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고 한다. 주몽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19년까지 살았던 걸로 기록이 되어 있다. 이름 자체도 그렇고 주몽신화에 보면 백발백중으로 활솜씨가 너무 뛰어나 시기를 받았고, 고구려를 세우러 도망갈 때 강을 활로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어 피신할 수 있었다는 내용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나라도 가장 오래 된 역사책인 삼국사기의 위와 같은 기록상 기원전부터 활을 사용한 걸로 볼 수 있다.
유물을 통해 살펴보면 활은 구석기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신석기시대에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걸로 확인된다. 약 18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단양 수양개 유적에서는 자루가 달린 돌화살촉과 창촉이 발견되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활 자체가 나무로 만들어지는 거라 지금 활의 형태로 남은 건 없다. 흑요석으로 만든 화살촉이 많이 발견되어 활을 활발하게 사용했던 걸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활은 길이가 짧은 단궁에서 시작해 복합궁으로 발전해 나갔는데, 단궁이긴 하지만 대나무, 뿔, 힘줄 등을 활용해 장력이 뛰어나 멀리 정확하게 나가는 고성능의 활이 생산되었다. 길이가 긴 장궁이 아니어도 장궁만큼 위력적이어서 단궁이 발달한 게 우리나라 활만의 특징이다.
우리 고유의 활은 현재는 국궁으로 계승되고 있으며, 1950년대 말에 들어온 양궁과 구별하기 위해 전통 활을 국궁으로 부르고 있다. 양궁과 국궁을 이용한 경기에도 차이가 있는데 양궁은 90m, 국궁은 145m의 거리를 두고 겨룬다. 또 양궁은 조준장치를 사용 가능하고 과녁에 맞는 위치에 따라 점수가 다르지만, 국궁은 궁수의 힘만으로 조준해야 하며 과녁판만 맞추면 되는 등 경기 방식에 있어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