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키타카 독서모임 2023년 12월
★★ 어릴 때 듣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하지만 공감은 잘 안 되는.
나의 외할머니는 장남인 큰외삼촌의 부산 집에 사셨는데, 내가 초등학교 때 서울에 있는 우리 집에서 며칠 동안 계신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신실한 불교신자로 지팡이처럼 굽은 허리로 아침 6시, 저녁 6시면 하루도 빠짐없이 108배를 하셨다. 투명하게 하얀 머리카락에 쪽을 지고 다녔던 할머니는 나이가 들어서도 엄마처럼 피부가 하얗고 깔끔한 사람이었다. 아마 엄마가 할머니처럼 단정한 사람이라는 것이 순서가 맞을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할머니는 일제강점기와 6·25, 그 후 격동의 한국사를 겪어낸 여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고왔다.
최은영의 <밝은 밤>은 영옥이 손녀인 지연에게 들려주는 그녀의 어머니인 삼천이와 새비, 희자, 딸인 미선의 이야기이며 현재를 사는 지연과 지연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이다. 삼천이와 영옥, 미선, 지연은 남편과 아버지,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갖지 못한 연대를 친구와 고모, 할머니와 맺으며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 간다. 이 밤의 이야기가 아주 특별하고 희귀한 이야기가 아닌 한국인에게 흔한 가족의 역사라는 것이 씁쓸하지만 놀라웠다. 독서모임을 함께 하는 우리는 지연이기도 했고 우리의 할머니는 영옥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또 다른 딸은 영옥의 옛날이야기가 '지긋지긋' 하고 '구질구질'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책의 메시지는 치유와 공감인가?
그런데 나는 왜 잘 공감이 안될까.
오정희 작가는 이 책에 대해 "슬픔을 위로하고 감싸주는 더 큰 슬픔의 힘"이라고 했다.
백정의 딸이었던 삼천이는 모두가 무시하는 자신을 한 인간으로 대해주는 친구 새비를 통해 처음으로 존중과 인정의 경험을 받는다. 아들이 아니었던 삼천이의 딸, 영옥은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새비의 고모할머니로 받는다. 영옥의 딸 미선은 아빠와 사회로부터 받지 못한 지지를 친구 명희에게, 지연은 가족과 남편에게 받지 못한 이해를 친구인 지우와 할머니인 영옥에게 받는다. 사람의 아픔은 사람을 통해 치유된다라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 꼭 이분법적이어야 했을까?
꼭 그렇게 남자대 여자로 편을 갈라야 했을까?
물론 전형성을 벗어나는 새비아저씨가 있었지만, 그 외의 남자는 모두 바람 안 피고 안 때리고 도박만 안 하면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기형적인 남성상이다. 삼천이의 남편은 아내의 발에서 피가 철철 나도 개의하지 않는 이였으며, 영옥의 남편은 처자식이 있는 것을 숨기고 결혼을 했고, 미선의 남편은 아내가 암으로 수술을 해도 자신은 취미생활을 즐기는 남편이며 외도한 남편과 이혼하려는 딸 앞에서 이혼으로 상처받을 사위를 먼저 걱정하는 아빠였다. 삼천이와 영옥은 몰라도, 미선이와 지연은 자신들의 삶을 바꿀 힘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그들은 보다 건강한 남성을 만날 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마저 한국사회의 낡은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은 실망스럽다. 그것은 엄마의 탓도 아니고 남편의 탓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감이 잘 안 되는 다른 부분은, 이 책의 딸들은 희자를 빼면 엄마와의 관계에서 주는 힘을 철저히 축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천은 영옥을 위해 영옥은 미선을 위해, 미선은 그녀의 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하고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삼천은 나라면 열두 번도 더 죽고 싶었을 것 같은 순간에도 자식의 손을 놓지 않았고, 말로 딸을 때리는 남편의 앞을 가로막는 것도 엄마인 삼천이었다. 아빠 없이 홀로 딸을 키운 것도 영옥이고, 서투른 위로의 말로 미선의 마음에 상처를 줬지만 정말 필요한 순간에 그녀의 아이들을 돌보아 준 것도 영옥이었다. 끝까지 이유는 나오지 않았지만 생때같은 자식을 잃고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기쁨이 없던 미선이 포기하지 않고 지연을 기른 것도 분명 희생과 사랑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왜 자신들이 받은 것보다 받지 못한 것, 나에게 없는 것에 더 집중했을까. 그녀들의 엄마가 준 희생이나 사랑보다는 아버지가, 남편이 준 상처를 유독 부각한다. 그래서 치유를 안이 아닌 밖에서 찾는다. 미선은 영옥에게 지독하고 지연은 미선에게 매몰차다.
엄마에게 미선은, 미선에게 지연은 이해가 가는 듯 하지만 이기적이다.
실제 삶에서 연대는 여전히 외부 보다 내부에서 더 많이 온다. 코로나 19가 지나간 현재는 더욱 그렇다. 왜 이렇게 가족중심적인지 한탄스럽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남자 대 여자 보다 가족 대 타인이다. 그리고 그 가족이 깨질 때 세상에는 새비도 지우도, 할머니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나의 엄마는 미선과 같지 않았다.
병든 외할아버지는 당신이 죽기 전에 7남매 중 6번째 딸이었던 엄마를 시집보내고 싶었다. 불안한 마음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사위를 골랐고 선택의 힘이 없었던 엄마는 아빠를 세 번째 보는 날 결혼했다. 원치 않는 결혼을 한 이후, 엄마의 삶은 고난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옛날의 엄마는 5첩 반상을 차리고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저녁이면 아빠가 좋아하는 갈치를 바삭하게 구웠다. 하지만 내 기억이 또렷한 순간부터 엄마는 치열하게 아빠와 싸우고 자신의 삶을 살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관통하는 그들의 전쟁이 지긋지긋했지만, 생각해 보면 엄마는 남편으로부터, 자신을 여자로 가둬놓은 사회로부터 독립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엄마는 할아버지를 한 번도 나쁘게 말한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기 이름이 싫다는 어린 딸을 앞에 앉혀 두고 말했다고 했다. 엄마의 이름을 딸이 편안하고 아름답게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자 하나하나를 골라지었다고 말이다. 할아버지에게 엄마는 소중하고 예쁜 자식임을 그 누구보다 엄마가 잘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