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망상 vs. 가스라이팅
어릴 적에 언니들과 큰 방에 나란히 누워 주말의 영화를 보았더랬죠. 아침이면 명작만화 보고 아침 먹고 한 지붕 세 가족 보는 게 요새 말하는 '루틴'이었는데 말이에요. 그때 봤던 영화 중에 지금도 생각나는 영화가 혹성탈출(리메이크 아닌 원작!), 사운드 오브 뮤직 그리고 가스등입니다. 지금은 언제 어디서든 OTT를 통해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 있지만 그 시절에는 주말 밤을 기다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또는 누워 영화를 보고 잠이 들었더랬죠. 흑백영화였던 가스등은 보는 내내 좀 으스스하고 미스터리하고 억울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아.. 저 남자 저거 나쁜 놈인데.. 사람들은 주인공(그때는 몰랐는데 그 주인공이 그 유명한 잉그리드 버그만이었죠!)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 줄 알고 오해를 하는데 보는 내내 얼마나 가슴을 쳤는지 모릅니다. 결국 남편이었던 악당(놈)이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아 보석을 훔치려 한 계략이 밝혀집니다.
최근에 많이 회자되는 '가스라이팅'이 그 가스등이라는 연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유래한 용어입니다. 영화에서 처럼 실제는 정신병이 아닌데 남편의 술수 때문에 스스로 병이 들었다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남편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상담에서도 스스로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것 같다고 얘기하는 분들이 최근에는 부쩍 늘어났습니다. 부부관계나 연인관계 친구관계나 업무관계에서 이전에는 자신의 책임이고 잘못이라고 생각하던 일들이 지금은 상대의 몰아가기식 비난이나 교묘한 통제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나 하는 자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실생활에서는 영화에서 처럼 명확하게 이 사람은 악당, 이 사람은 선의의 피해자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나는 좋은 의도로 배우자에게, 자식에게, 연인에게, 후배에게, 직원에게 얘기를 했는데 곡해하여 받아들인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농담으로 한 말인데 진담으로 받고 '오버한다'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언 같은 비난이나 기분 나쁜 농담, 도움 같은 통제를 단박에 알아채고 쿨하게 거절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당황하여 수긍하고 돌아서서 의심하거나 그런 일이 반복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게 되면 자책에 빠지고 심리적인 독립성을 잃기도 합니다.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애매한 경우에서 사람들은 상대의 의도가 무엇인지 반복해서 고민합니다.
'내가 예민한 걸까 저 사람이 나를 가스라이팅 하는 걸까?'
이렇게 말입니다.
H는 자식들이 독립하고 아내와 둘이 살고 있는 직장인입니다. 4년제 대학을 나와 스스로 엘리트라고 생각하며 대외적인 봉사나 종교활동도 적극적으로 하는 자신감이 넘치는 60대 초반의 남성이었습니다. H가 내방한 이유는 최근 분노 조절이 잘 안 되어서였습니다. 아내는 같은 회사를 다니다 육아 때문에 먼저 퇴직하고 10년 이상 주부로 만 지내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의심이 너무 과하고 집요하여 최근에는 그 정도가 넘어 자신이 매우 억울하고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초기면접 상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으니, 아내는 자신의 유머에 과하게 반응하고 자신의 대인관계를 너무 의심하고, 혼자서 의심을 키우고 상상의 나래를 핀 후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얘기하고 화를 낸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친구들과 저녁모임에서 자신이 유머러스하게 아내를 소개했는데, 아내는 그때는 가만있다가 며칠 있다 화를 냈다고 합니다. 아내가 혼자 의심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사실과는 다른 상상을 하다 결국 자신에게 화를 내는 패턴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어 지금은 아내가 있으면 농담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또, 수십 년 만에 찾은 여자 동창과 메일을 주고받고 용기를 주는 문자를 좀 보냈는데 그것으로 아내가 혼자 만의 상상으로 자신이 외도를 하는 것처럼 몰아가 수년간 비난을 하는데 최근에도 그 일 때문에 싸움이 났다고 합니다. 물론 형편이 너무 안 좋아 돈을 좀 주었는데 그 부분은 자신이 오해를 살만 했다고 인정하고 사과를 했지만 자신의 잘못이 아닌 부분에서도 아내가 너무 의심을 하니 억울해서 이제는 화가 난다고 합니다. 핸드폰도 다 보여주고 이메일도 보여줬지만 아내의 의심이 한 번씩 도지면 과거의 일들을 다 얘기하며 원망하고 비난을 하니 참기가 힘들다고 말입니다. 원래 자신은 사교적이고 유머가 있으며 측은지심이 많은 사람인데 아내의 의심과 불만 때문에 사회생활을 줄이면서 요새는 삶의 재미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H의 마음속에 아내는 예민하고 융통성이 없으며 피해망상이 있고 자신에게만 너무 의지하는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바뀔 사람이 아니기에 자신이 분노를 조절하는 것이 최선이라 그 방법을 배우려고 상담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 주 동안 화가 나거나 억울한 상황을 잘 관찰해서 다음 주에 만나 얘기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다음 주에 H가 다시 상담실을 방문했습니다.
한 주간 H는 아내와 화해를 했고 기분이 좋아졌고 더는 화가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기분이 나빴던 순간이 거의 없고, 종교적인 믿음으로 아내의 의심과 예민한 마음, 불안을 모두 용서하기로 결정하였더니 더는 화가 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성 친구는 만나지 않았고, 아내가 의심하는 말들을 하면, 적정 수준에서 그만하자고 설득하고 자리를 피했다고 합니다. 아내는 도무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자신이 말을 조심하고 여자 동창들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최선인 것 같다며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했습니다.
H는 스스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방법을 얘기하고는 홀연히 상담실을 떠나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다음에 공짜로 밥 한번 산다 생각하고 또 올게요."
순간 머릿속에서 '댕' 하고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아... 이대로 가시면 안 되는데...
저 역시 H의 농담이 며칠간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H의 농담은 분명 불쾌한데 대놓고 화를 내기에는 애매한, 다른 사람의 중요한 가치를 뭉개고는 농담으로 포장하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H는 그것이 부적절한 말이고 옳지 않은 태도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상담사로서 나는 왜 더 빨리 H가 자신의 태도는 합리화하고 문제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패턴을 인식하고 알게 하지 못했나 무릎을 쳤습니다. 직면이 본상담 1회기 에서 하기에는 이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안타깝고 자책이 되었죠. H의 아내도 남편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내가 예민한 것일까 그런데 나는 왜 기분이 나쁠까를 생각하며 며칠을 또는 몇 년을 고민했을 수도 있겠다는 가정이 들었습니다.
H는 가해자일까요 아니면 피해자일까요?
아내는 피해망상일까요 아니면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는 걸까요?
H는 아마도 아내 때문에 또 화가 나고 스스로 넓은 마음을 가지려 아무리 노력해도 억울함이 가시지 않는 때가 있을 겁니다. 그때가 오면, H가 꼭 공짜로 밥 한 번 산다 생각하고 상담실에 또 오시기를 바라 봅니다. 그럼 자신을 위해 상대를 존중하고 공감하는 방법을 알려 드리고 더는 억울해서 화가 나지 않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
가스등(1948) 대사 중에서
"엘리자베스, 들려? 저기 위에서 소리가 나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 들어봐"
"아무도 올라갈 수 없어요. 그냥 상상해 내신 거예요"
천장에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엘리자베스의 상상일까요?
* 본문의 사례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실제 사례를 재구성한 것으로 실제와는 다른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