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li Whale Jan 24. 2023

I. 대학 못 가면 이생망

100세 인생이야 앞으로 82년 남았다.

얼마 전 2023년 대입수능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 곧 입시시즌도 끝이 나네요. 귀신같이 수능시험이 있는 주에는 이전 주와 비교해 한파가 찾아오지요. 귀도 눈도 없는 날씨도 그날의 삼엄함을 아는가 봅니다. 수능이 있기 몇 달 전부터 상담센터에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늘어납니다. 다들 나만 유독 힘든가 해서 쭈뼛쭈뼛 들어오는데 사람들이 대기실에 가득하고 센터에는 모자를 푹 눌러쓴 학생들이 여기저기 앉아있습니다.  


저에게도 대입을 준비 중인 내담자가 언제나 한 두 명은 있습니다.  고등학생도 있고 재수생도 있고 회사를 다니다가도 다시 대입을 준비 중인 성인도 있습니다. 공부가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이전에 상담센터 회의가 혜화동에 있어서 서울대학병원 근처로 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서울대학교 의대 과잠을 입은 학생들이 여기저기 보이는데, 어른인 저도 우러러보게 되더라고요. '그들은 공부가 재밌었겠지?'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들인들 공부가 그저 쉬웠을 리 없습니다.


고2인 I는 미술로 대학을 준비하는 일반고 학생입니다. 정시, 수시 다 넣을 생각이지만 실기 100%인 학교를 생각하고 있어 내신보다는 실기에 집중하고 수능은 최저점을 넘기는 것이 목표입니다. 처음에는 미술이 좋아서 시작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재미도 없고 자신이 잘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학원에서도 학교에서도 잘하는 애들은 너무 많고 시간은 짹깍짹깍 흐르는데 자신의 실력만 그 자리를 맴도는 것 같아 불안한 마음에 공황장애를 겪다 상담실에 오게 되었습니다.   


- 이번 주는 어땠어요?

- 최악이었어요. 학원만 가면 미칠 것 같아요. 내가 뭐 하는 건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너무 불안해요.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고...

- 그만두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계속 가지도 못하고 나는 거기에 딱 갇혀있다는 생각이 드나 보네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나요?

- 별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학원에서 품평하는데 얘들 그림 보니까 너무 잘 그렸더라고요. 저보다 더 늦게 시작한 애도 있는데 개성 있고 색도 잘 쓰고요. 제 그림 보니까 정말 객관적으로 너무 못 그렸어요. 잘하지도 못하는데 이걸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  다른 친구들의 그림과 비교하니 상대적인 박탈감도 들고 자책도 들었나 봐요. 그러니 학원에 있는 시간이 지옥같이 느껴졌겠어요.  

- 네 죽고 싶었어요.

- 그렇게 괴로운 마음인데 계속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뭐였을까요?

- 그나마 안 가면 대학 못 가잖아요. 대학 못 가면 취직도 못하고, 부모님도 대학 못 가면 혼자 알아서 살라고 하시고요.    

- 그러니 잘하고 싶고, 못한다고 생각되는 스스로가 부족하게 느껴지고, 앞으로의 삶이 막막하게 느껴져서 다 그만두고 싶었나 보네요.

- 네...... 잘하는 건 그래도 미술 밖에 없는데 이것마저 이러니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그런데 대학 정말 못 갈까요?

- 네?

- 우리나라 수험생 보다 대학 정원이 더 많을걸요. 앞으로는 더 할 거고요. 서울대나 홍익대만 목표인가요?

-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 어디를 가느냐의 문제지 대학은 갈 수 있어요. 또, 나는 정말 내가 생각한 것만큼 최악으로 못할까요? 그럼 이제까지 상도 타고 선생님들이 칭찬도 많이 해주셨는데 그건 다 거짓이고 우연일까요? 다른 친구들도 선생님도 진짜로 내가 못한다고 말씀하셨어요?

-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 미술 아니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요?

- 네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 내 나이에 맞게 딱 지금 원하는 대학 못 가면 이 번생은 망하는 건 거죠?

- 아닌가요?

- 그럴까요? 지금 몇 살이에요?

- 18 살이요.

- 현재 평균연령이 여자가 80세 정도니 I의 세대는 100세까지는 살겠지요. 그럼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82년 그림 그리는 일만 하며 살까요? 그건 정말 바라는 일이에요?

- 아니요. 뭔가 끔찍해요.

- 하고 싶은 일은 또 생길 수 있고, 재밌는 일도 변할 수 있어요. 평균연령이 60 세 정도 되고 주당 근무시간이 60시간 넘던 옛날이야 평생직장이란 얘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림 그리면서 글도 쓸 수 있고, 그러다 사업해서 성공할 수도 있고, 여행가가 될 수도 있고 다시 미술을 할 수도 있겠죠. 이제는 N잡러의 시대잖아요. 대학은 지금 안 가면 정말 망할까요? 어디든 들어가서 반수해도 되고, 2년 다니다 편입해도 되고, 다니다 별로면 휴학하는 일도 다반사이죠. 미술 전공해도 마음에 안 들면 전과해도 되고, 애매하면 복수전공도 가능하죠. 지금은 이거 아니면 망할 것 같지만 사실 인생의 길은 큰길, 작은 길, 샛 길, 우회도로 널리고 널렸어요. 고속도로라고 달렸는데 공사 중이라 정체일 때도 있고, 국도로 돌아갔는데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에 멈춰 서서 행복해하기도 하죠.       

- 네...

- 20세에 대학 가서 24살에 졸업해서 같은 일 82년 하며 살면 정말 재밌겠어요?

- 어휴... 아니요.

- 아님 미술 아니고 수학을 한다고 하면 그건 더 편할까요?

- 아니요 그건 더 최악이에요.


한 곳만 바라보며 노력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시야가 좁아지고 특히 힘이 없는 미성년자들은 어른보다 더 불안하고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럼 흑백논리로 세상이 보이고, 흑이나 백이 아니면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굳어 있는 생각이 말랑해지지는 않겠지만, 굳어지면 또 풀고, 휘어지면 다른 방향으로 또 말다 보면 아마 지금보다는 좀 더 유연해지겠지요. 저의 내담자도 그 과정에서 좀 더 현재가 견딜만해지기를 저는 기도합니다.




인생은 흑과 백의 바둑판은 아닙니다. 

총천연의 색이 면과 선을 그리고 각각의 명암이 커졌다 작아지는 살아있는 캔버스입니다.    


올해 그 대학 못 가면 이생망?

NO!  Life goes on.


* 본문의 사례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실제 사례를 재구성한 것으로 실제와는 다른 내용입니다.



이전 11화 H. 내 아내는 피해망상입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