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멱살 잡고 끝난 빌어먹을 짝사랑

by Lali Whale

지난 토요일 밤 내 속에 불을 지른 아들은 다음날 친구네 집에 게임하러 가겠다고 안방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계속 숙제를 안 해온다면 앞으로 학원에 다닐 수 없다는 경고를 들은지 12시간도 지나지않은 때 였다. 숙제를 미리 하고 가라니 그럼 놀 시간이 없어서 안되신단다. 그럼 숙제할 시간은? 이래서 수학을 못하나? 놀 시간은 부족하고 숙제할 시간은 남냐? 놀고 와서 할 건데 엄마는 왜 저러냐며 자신이 놀고 와서 안 한 적이 있냐며 소리를 지르는데 그 억울함이 너무 진짜 같다. 내가 틀렸나 곰곰이 생각해도 그런 적이 없다. 백번 중에 한 번은 있었나 보지? 하지만 기억이 안 난다. 녀석은 먹튀전문인데? 너 놀고 와서 한 적 없다고 말해줬는데 귓구녕이 막혔는지 자기 할 말만 한다. 주말 아침에 남편이랑 둘이 안방에 숨어서 서로가 없었으면 저 진짜 같은 거짓말에 억울해 죽었을 거라고 낄낄거렸다. 가끔 우리 아들은 바보인가? 부부가 앉아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제 일을 기억 못 하고 자신의 삶을 미화하는 것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내가 돈도 다 내겠다는데 학원에서 오지 말란 게 처음도 아니다. 이번에는 진짜 아들(놈)이 숙제를 한다고 꼭꼭 약속을 해서 무려 10만 원의 예치금을 스스로 내고 간 학원이었다. 하겠다고 하고 안 하는 게 청소년의 특권인가? 8년 동안 반복되는 숙제와의 전쟁에 나 역시 분명 백기를 든 줄 알았는데 여전히 가슴속에 총을 숨기고 있었다. 끝나지 않은 거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아들이 숙제 좀 했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이 게임을 끝내지 못하게 만든다. 도대체 숙제도 안 하면서 학원은 왜 다니겠다고 우기는지. 이유는 알고 있다. 공부는 너무너무 싫지만 힘든 일은 하기 싫고 미래는 좀 걱정되니 학원에 발이라도 한쪽 걸쳐두고 싶은 것 같다. 하지만 그 불안이 숙제를 100% 하게 할 만큼 크지는 않다.


아들의 고성방가에 참지 못한 남편이 그럼 갔다 와서 하라고 하니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쏜살같이 나갔다. 아! 얄미워!


12시에 나가는 놈의 뒤통수에 5시까지 와서 숙제를 하라고 했는데 6시가 되도록 안 온다. 빡이 친다. 그래도 내가 대학원까지 나온 사람인데 아들엄마로 살면서 욕이 터져서 집안이 할렘가를 능가한다. 올해 나이도 한 살 더 먹었는데 욕하지 말자고 남편이랑 약속도 했는데... 6시 5분 드디어 마지막 버튼이 눌렸다.


쌓아놓았던 분노가 단단하지도 않은 둑방을 터트렸다. 중간중간 이미 여기저기서 물이 졸졸 새고 있어 곧 무너질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허술한 둑방이라도 한 두번의 가격에 무너지진 않는다. 그러니 이것은 원타임 이벤트가 아니라 연속된 이벤트로 인한 붕괴며 폭발이다. 아들이 주 3회 영어공부 한다고 나와 약속을 하고 4월 통틀어 2회 했다. 5월은 그나마 1회 했다. 억울한 건 아들이 하겠다고 해서 내가 도와주기로 했다는 거다. 진짜 내가 억지로 시킨 게 아니다! 했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하라고 하지 않았다. 하란다고 할 애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부 양도 방식도 페널티도 아들이 허락한 대로만 했다. 아들의 숙제 성취도와 시간을 그래프로 그리면 천천히! 사막을 지나가는 100마리의 낙타 같은 모습일 거다.


야! 네가 한다고 했잖아! 엄마가 안 한다고 못한다고 하기 싫다고 했지! 그런데 왜 마치 내가 억지로 시킨 것처럼 화를 내냐고! 페널티(핸드폰/게임 시간제한)를 받아내려고 하면 그렇게 화를 낸다. 나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매년 매달 매주 반복되는 일이다. 난 약속한 대로 아들이 숙제를 안 해서 핸드폰 스크린타임을 조절하고 그래도 안 해서 비밀번호를 막았을 뿐이다! 금요일에 숙제 안하고 갔으니 토요일에 친구랑 게임은 못한다고 했을 뿐이잖아! 네가 동의했잖아! 그럼에도 보내 줬으면 제때 와서 숙제 해야지? 아들! 이게 무슨 적반하장이여!


결국 욕이 터졌다.


핸드폰에 대고 달팽이관이 달달 떨리게 소리를 질러서 아들을 불러냈다. 게임을 하다 말고 억지로 온 아들이 오만상을 찡그리고 현관문 앞에 서있다. 와! 세상에 이렇게 염치없다고! 자기는 6시에 온다고 했단다. 물론 이미 6시도 넘은 지 오래... 그나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안왔...


아들의 멱살을 잡았다.

뭐야. 꿈쩍도 안 한다. 나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세다.

젠장. 품위는 개뿔.

미친년처럼 욕이나 하다 본전도 못 건졌다.

자괴감이 쏟아졌다.


훌륭한 엄마는 애초에 포기했고 또라이는 되지 말자고 몇 시간 전 산책할 때 다짐했는데 오늘도 실패.

자기가 언제 한다고 하고 안 한 적이 있냐며 말도 안 되는 뻥을 치며 괴성을 지른 아들은 그날도 숙제를 안 했다.

숙제는 안 했는데 친구가 놀자고 해서 다음날도 내뺐다.

숙제는 또 갔다 와서 하면 된단다.

이번에는 6시에 온다고 했는데 6시 반이 되도 오지도 않고 전화도 안 받는다.


역시 일요일도 숙제는 실패.


앞으로 5년 반을 이 신용불량자와 함께 살 생각을 하니 아들 방학 때마다 심해지는 부정맥이 올라오는 것 같다.

살 길은 기숙사 고등학교뿐이다. 인터넷을 뒤져서 기숙사 고등학교를 알아봤다. 우선은 당장 죽겠으니 여름캠프도 살펴본다. 가란다고 갈 놈은 아니지만, 나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맙소사. 좋은 캠프는 이미 마감된 지 오래다. 아주 고가이거나 신나게 노는 캠프만 남아있다.

기숙사 고등학교는 대부분 비평준화지역의 공립고나 사립고, 특수목적고등학교인데 내신이 좋아도 가기가 어렵단다.

젠장.

진짜 기숙사에 가서 전문가의 교육을 길게 받아야 할 야생 멧돼지는 갈 곳이 없는 것인가?

출산율을 높이려고 한다면 중학교부터 학도병제를 부활하자고 병무청에 민원을 넣어야 하나? 아니 보건복지부인가? 방학마다 육군 캠프, 공군 캠프, 해군 캠프 3주씩만 보내줘도 자식을 둘은 더 낳을 것 같다.


아니다. 분명 있을 거다. 포기하면 안 된다.


우선 핸드폰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다시 계약서를 작성했다. 1개월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핸드폰과 공부 조건을 맞춰주고 80% 미만 달성 시 엄마가 선정한 여름/겨울캠프에 참여할 것. 1년 이상 성과가 80% 미만일 시 기숙사 고등학교로 들어갈 것.


아... 이 계약서는 꼭 공증을 받아야겠다.



화요일의 기도 (이번 주만 특별히 기도로 변경합니다.)

- 아들이 이번 여름과 겨울에 쌍팔년도 학교를 방불케 할 스파르타 캠프에서 정신개조를 받아 새사람이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안되면 어디라도 갈 곳이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 아들이 2028년도에는 엄마 곁을 떠나 자유롭고 주도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기숙사 고등학교에 갈 수 있게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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