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
나는 작년부터 주 4일제로 일하는 남편과 목요일마다 데이트를 한다. 지난주에는 북악산을 가려다 길을 잘못 들어 인왕산에 갔고 그전 주에는 바다가 들어찬 대부도 해솔길을 걷다 바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매번 헤매는 이 여정의 기획, 감독, 출연은 모두 나다. 나는 수요일부터 기분이 좋은데 내일이면 남편과 지구 끝까지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오빠! 나는 오빠랑 지구 끝까지 가고 싶어."
"지금 가고 있는데 또 어딜 그렇게 가고 싶다는겨!"
"지구 끝까지!"
남편과 차에만 타면 하는 말이라 그는 대체로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이지만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마트든 직장이든, 국도든 고속도로든 막히지 않는 길을 달리고 있자면 이대로 이 세상 끝까지 달려가고 싶다. 가슴이 솜사탕처럼 부푼다. 물론, 못 간다. 우린 어른이니까. 하지만, 목요일에는 어디든 갈 수 있다. 정해진 곳이 아니어도 우리는 달리고 걷고 유턴하고 정차하며 간다. 지구는 둥그니까 어디에 가든 지구 끝까지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목적지없이 계속 '가는 중'이라는 것이 좋다. 그와 지구 끝까지 가는 날에는 뚝딱이는 어깨가 절로 들썩인다.
"너는 그렇게 좋아?"
"응, 나는 너무 행복해."
"얼씨구. 저 찡빠오."
그가 나에게 준 행복은 내가 그에게 주는 제일 큰 선물이다. 남편도 나도 가족이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유년기를 보냈다. '왜 저렇게 힘들고 불행할까? 왜 나의 부모님은 매일 돈이 없고 매일 힘들고 매일 싸울까.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다들 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나는 그와 결혼하고 줄곧 좋았다. 슬픔이 오래가는 날이 없었고, 억울하고 외로운 날이 (거의) 없었다. 힘든 순간에도 우리가 함께고 살아있으면 괜찮았다. 집이 작으면 작은 대로 월급이 적으면 적은 대로 몸이 아프면 아픈 대로 죽지만 않으면 행복할 수 있었다. 내가 믿기에 그도 그랬다. 나는 그와 결혼하면 내가 행복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고 뒤도 옆도 보지 않고 결혼했다. 결혼식을 할 때도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가장 즐겼고 내가 가장 신이 나서 식이 끝날 때까지 활짝 웃었다.
결혼 초기에는 계속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우리가 변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래서 빨리 10년이 지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15년 째인데 여전히 좋다. 그 긴 세월이 놀라울 정도로 같은 마음이다. 사실 처음보다 지금이 더 좋다. 그때는 "쟤는 왜 저래?"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서로에게 조금씩 있었지만 지금은 "쟤는 저렇지만 괜찮아"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상습적인 장난꾸러기에 괴물딱지 쫌팽이다. 그 실체를 숨겨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거의 매일 "적당히를 모르지! 적당히를!"라는 비난과 "또 못살게구네!"를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남편이다. 하지만 장이수가 마석도를 피하지 못하듯 남편도 나를 피하지 못한다. 나는 그 안전하고 충만한 행복을 어떤 도파민과도 바꾸지 않는다. 나는 내 행복을 세상이 시샘할까 봐 다 말하고 다니지도 않았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남편이 코웃음을 친다.
"우리가 그 정도는 아니잖아."
"몰라. 난 그래. 그래서 사람들한테 자랑은 안 하고 브런치에만 몰래 써."
"하여간 저 찡빠오."
그래도 다 아는지 내가 간혹 남편 얘기를 하면 엄마가 말한다.
"네가 네 남편 안 좋은 게 뭐 있냐? 다 좋지."
귀신이다. 나는 다 좋다. 그의 보들보들한 겨드랑이 살도 따뜻하고 작은 손도 넓고 반들반들한 이마도 새우 같은 눈도 좋다. 그리고 그가 안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래서 많이 행복하다는 것을. 그래서 그가 뿌듯하고 자신감 있고 행복하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좋은 그와 지구 끝까지 가고 싶다.
그런데 내가 정말 누군가와 그렇게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냐 하면 전혀 아니다. 나는 모눈종이의 네모 한 칸에 혼자 있는 사람이다. 그 안에 가족이라도 같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내 시간, 내 장소가 필요하고 지켜지지 않으면 미친다. 성난 복어처럼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다가오면 죄다 찔러 버린다. 그런데 그만은 호주머니에 넣어 어디든 같이 있고 싶다.
그래서 문제다. 나는 그를 내 것처럼 소유하고 싶다. 그도 그의 네모 한 칸에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그는 혼자 잘 있는 사람이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단순하고 에너지가 적고 외로움의 구멍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쓸쓸하지만 내가 그와 행복하기 위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를 '적당히'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를 언제나 언제나 내 주머니에 넣어 놓을 수만은 없다.
사랑도 슬픔도 그 순간에 찍힌 점이지 이어진 선이 아니다.
그러니 오늘 좋았다고 내일도 좋으리란 보장이 없고 어제 슬펐으니 오늘도 슬플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감정은 오직 그 순간의 진실일 뿐이다.
하지만, 같은 높이에 있는 점들이 무한히 모이면 선이 되듯 우리의 소소한 행복도 수없이 모여 끊기지 않는 선이 되길 바란다.
화요일의 감사
- 또 못살게 굴어도 당해줘서 감사
- 분기별로 주겠다는 자유를 반으로 싹둑 잘라서 미안
- 그래도 코스모스 회동은 재고해 주기를 부탁^^
- 나도 당신을 매일 주머니에 넣고 다니진 않겠다고 약속!
*표지사진은 Pixabay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