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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짝사랑 2.

멀티태스킹, 육아는 제외

by Lali Whale

나는 멀티태스킹의 황제다. 눈치가 빠르고 일머리가 좋은 데다 체력이 장난 아니(었)다. 새벽 2시에 자고 아침 6시에 일어나도 활동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었다. (안타깝게 지금은 아니지만.) 20대에는 새벽에 일어나 자기계발하고 학교 가고, 땡치면 나와서 알바가고 돌아와서 영화를 봤다. 대학원에 가서는 수업시간을 빼면 연구소에서 일하고 틈틈이 논문 쓰면서 주말에는 번역이나 모니터링 알바를 하고 주 1회 여의도에서 시나리오를 배웠다. 학생딱지를 떼고부터는 개인 상담을 하면서 집단상담을 하고, 강의하면서 상담워크북을 만들고 그러면서 소설을 썼다. 그 모든 빡센 일정 중에 신작 영화 챙겨보고 연애도 빠지지 않았다. 구글 스케줄표를 썼다면 일정이 중복되는 구간이 곳곳에 있을 것이다. 그릇 안에 할 일을 넘치게 담고 해내면 도파민이 팡팡 터졌고 내가 굉장히 열심히 산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학교 '밖에' 안 다니면서 돈도 안 벌고 자기계발도 안 하는데 연애도 못하는 동기나 선배를 보면 한심해했다. 부모 돈으로 대학원을 다니면서 연구성과도 도드라지지 않는 연구자들을 볼 때도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하는 자신이 뿌듯했다.


그러니까 나는 젊은 꼰대였다.


아 멀티가 안되는구나!라는 한계에 봉착한 것이 육아였다. 그 생각은 13년째 같다. 아. 혼자 도저히 못하겠구나 백기를 든 것도 육아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2년 간은 이 생명을 기르는 일 이외에 한 것이 없다. 집안일은 했다! 집을 청결히 유지하고 아이에게 필요한 영양분과 의복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집안일은 육아의 일부이기도 했다. 멀티의 기본은 A를 하면서 B라는 과제도 독립적으로 동시 수행가능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아이 밖에 못 봤다. 친구도 거의 안 만났지만 어쩌다 한 번 만나도 눈은 아들의 호작질에 꽂혀있었다. 책을 읽어도 마음은 아들에게 가 있었고 영화를 봐도 감동은 그 안에 없었다. 사진 속의 피사체는 모두 '너'였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유치원에 가면서 나는 사회인으로 다시 노동의 현장에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픽업하는 순간 다시 바보가 되었다. 그게 너무 힘들었다. 가만히 앉아서 아들을 바라보고 같이 씽씽이를 타고 블록을 쌓고 플라스틱 옥수수를 반으로 가르는 일. 너무 지겹고 비효율적이고 허리는 아프고 재미는 없는데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일을 남에게 맡기자니 또 내 자식은 왜 이렇게 예쁜가. 요 이쁜 걸 남에게 맡기고 다른 일을 더 열심히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 시간을 내는 것 조차 아까웠다. 내가 더 늙기 전에 이거하고 싶어서 미국에서 박사를 포기하고 한국에 남았는데 육아를 남에게 맡길 턱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오롯이 나와 남편이 키웠다.


그러니 반나절 반짝 일하고 돌아온 나는 매일 쉬지 않고! 3시간씩 놀이터에서 반푼이 마냥 앉아서 그네-미끄럼틀-시소-모래놀이를 무한반복하는 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놓칠세라 책 한 글자 보지 못하면서 매의 눈으로 아들만 쫓았다. 그렇게 아들만 보는데도 미끄럼틀 계단에서 미끄러져 이마가 깨지고 그네에 머리를 박고 시소에서 떨어졌다. 그렇게 집에 오면 해가 뉘엿뉘엿 졌다. 후다닥 밥을 하고 전쟁같이 먹이고 대충 씻겨서 책을 읽어주었다. 육아만 하는데 밤이면 곯아 떨어졌다.

빵빵이에서 킥보드, 자전거까지 최소 10개의 바퀴달린 기구를 시기별로 갈아치움


멀티가 안 된다. 학교 가면 나아지려나 했지만 웬걸. 점심만 먹고 하교, 돌봄 교실에 보내 놨더니 친구들과 싸워서 한 달 만에 다시 가정 돌봄으로 돌아왔다. 오후 1시부터 아들과 얼굴을 맞대고 한 집에 있었다. 빌어먹을 강박에 텔레비전, 핸드폰, 게임도 금지였다. 그 모든 학습과 놀이, 심리치료까지 고학력에 체력은 좋았던 내가 맡았다. 2학년부터는 나아지려나 했더니 코로나 19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꼬박 초등학교 3년을 또! 아들과 한 집에서 싸웠다. 나는 머리털을 쥐어 뽑으면서 수학문제집을 풀리고 영어 단어를 외우게 하고 책을 읽게 했다. 포도알을 붙이고 돼지갈비로 유혹하며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아들을 데리고 미술치료까지 해주었다. 4학년이되어 비로소 학교에 정상등교할 수 있었고 신나는 방과후 수업도 재게 되었다! 하교 후 긴시간 동안 태권도, 검도, 미술, 수영학원이 아니었다면 미친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엄마가 고삐를 너무 세게 잡으면 아빠가 풀어주고 내가 열폭하면 남편이 안전핀이 되어주었다. 혼자라면 겨우겨우 할 수는 있었을 거다. 다만 허리 디스크가 터지든 관계가 깨지든 어딘가는 분명 망가지고 찢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남편은 나의 구원투수며 우리 모자의 쉼터고 3.8선이었다.


아들과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볼 때까지 해봤다. 미련이 없다. 난 더 잘 할 자신이 없다. 아주 좋은 엄마였다가 아니라 내 바닥까지 박박 긁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과 인내를 쏟아부었다. 알바는 3개월은 해봐야 알고, 취직이나 공부는 적어도 3년은 해보고 진짜 내 일인지 아닌지 결정했다. 육아는 10년을 해보니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어디서부터 능력 밖인지, 할 수는 있어도 부작용이 뭔지를 알게는 되었다. 그럼에도 실천은 어렵고 기대와 미련은 다 버릴 수 조차 없다.


잠깐이라도 눈에서 사라지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던 아기가 지금은 다리에 까만 털이 숭숭 난 청소년이 되었다. 아들은 밥과 돈은 잘 주고 참견과 통제는 안 하는 엄마를 기대하겠지만, 그가 내 기대를 다 채워주지 않듯 나 역시 질 수 없다! 그럼에도 어제 아들에게 저녁에는 뭐가 먹고 싶냐, 여름방학에 워터파크에 가고 싶냐, 가을 여행은 어디를 가고 싶냐, 내년에 해외는 가고 싶냐며 같이 놀자고 껄떡댔다. 나 그런 사람 아닌데. 남편이 머리통 보다 큰 수박을 가지고 집앞에 찾아와도 튕기던 도도녀인데 아들에게는 세상 쉬운 엄마다. 그 옆에서 남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저거 공부 많이 하면 뭐 하냐, 그냥 바본데.


그렇다. 나는 바보다. 그렇게 거절을 당하고도 아들이 엄마랑 같이 놀면 행복할 거라는 망상을 버리지 못했다. 녀석이 행복하면 나는 그걸 보는 것만도 좋다.


어버이날 전 주부터 당일까지 엄마는 카네이션도 받고 싶고 카드도 받고 싶다고 노래노래 불러서 꽃과 편지를 받아냈다. 꽃만 주고 카드는 없다고 해서 내 다이어리에 편지라도 써내라고 멱살을 잡았다. 광어처럼 엎어져 있었는데 절 받기가 이렇게 어렵다. 호랭이 같은 녀석에게는 상어같은 엄마도 광어가 되는구나.


빌어먹을 짝사랑!


2025년 5월 8일 아들에게 어렵게 받아낸 편지와 카네이션

화요일의 감사

- 아들이 엄마와의 풍파에도 장난기 많고 밝은 얼굴 그대로라 감사합니다.

- 복합쓰레기를 싫어하는 엄마의 가치관을 존중해 멀리 있는 꽃집에 가서 딱 꽃만 사온 아들에게 감사합니다.

- 이제 중학생이라 엄마가 필요없다니 이제 비로소 나의 눈과 귀를 내 삶에 쏟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 앗싸! 자유다!


* 참고. 아들아 주4일 일하는 아빠는 원래 개그본능이 있거든. '본능'은 원래 있는거지 원래 없는거 아니거든. 허락없이 사진 올려서 미안. 10년 전 사진이라 아무도 모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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