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에르가 이기는 세상
★★★ 바둑계에 먼저 온 미래는 순한맛?
이 책은 2016년 이세돌 9단과 구글의 바둑 AI 프로그램 알파고의 대국 후, 바둑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인터뷰 형식으로 따라가고 있다. 바둑기사들이 AI 시대에 맞춰 어떻게 적응하고 다시 바둑의 가치와 문화를 만들어가는지 그럼에도 여전히 고민하고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도 찾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기자이면서 소설가, 에세이스트인 장강명이 작가로서 AI 시대에 느끼는 불안과 어떻게 써야 할 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볼 수 있다.
나 역시 약 10년 전에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뉴스로 접했었다. 바둑에 큰 흥미가 없어 대국을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무려 이세돌이 컴퓨터에 완패하고 말았다는 소식은 충격이었다. 이제 우리는 뭘 해서 먹고사나 막연한 고민을 하다 언제나처럼 일을 하러 갔었지 싶다. 그리고 잊었다. 당시에는 AI 가 그렇게 일상화되어 있지 않았고 여전히 만화나 영화에나 나올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당장 나와는 관계가 없었으므로.
하지만 다시 이 책을 보게 된 지금, 2025년은 생성형 AI 가 일상 깊숙이 침투해 있다. 뿐인가! 과거 10년간의 발전 속도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게 발전하고 있다. 당장 내 상담사 일자리도 챗GPT에게 내어주게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로서의 나의 삶은 어떠할까? 그러니 먼저 온 미래를 맞이한 바둑기사들의 삶이 이제 나의 코앞에 닦친 미래 같았다.
알파고 이후의 바둑계에 대해 작가는 말한다.
인간 기사들이 속한 바둑계는 갑자기 평평해진 듯했다. 바둑계 인사들은 대체로 알파고의 등장 이후 인간 기사들의 실력이 상향평준화됐다는데 동의한다. (p.95~96)
AI 앞에서는 천재나 범인이나 개진도진인 것이다. 이제까지 거대한 벽이라고 느꼈을 이세돌 9단이나 조훈현 9단 같은 기사들도 AI 앞에서는 그냥 다 싸워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실제 AI 바둑 프로그램을 통해 성실하게 공부한 노력형 기사들 중에는 20위 권 밖에서 상위권으로 가파르게 순위 진입을 성공하기도 했다고 한다. 더 이상 천재형 기사들의 기백에 눌리지 않아도 되었고 공부한 만큼 승률은 높아졌다고 말한다. 여성기사와 남성기사에 대한 편견도 적어지면서 이전보다 많은 여성기사들이 순위권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이 부분이 가장 와닿았다. AI시대에는 모차르트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살리에르는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은 위안이었다. 나는 언제나 모차르트 쪽이 아닌 살리에르 쪽이었으니 말이다. 성실한 것은 자신 있었고 엉덩이 힘 만은 어릴 때부터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AI가 글쓰기에도 보편화되면 나도 한강처럼 쓰겠잖아!"
남편에게 농담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런 대작가는 꿈도 못 꿔.'라고 생각했던 높고 엄중했던 벽이 갑자기 어린애 머리통도 보일만큼 낮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작가가 묘사하길 자동차가 생겼다고 인간이 자동차와 달리기로 경주를 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자동차가 월등하기 때문이다. 누가 얼마나 더 빨리 뛰든 결코 차보다 빠르지 않다. 우사인볼트가 운전을 하든 내가 운전을 하든 차로 달릴 때 중요한 것은 인간의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차의 성능이다. 거기에 누가 더 빨리 운전을 배우고, 많이 연습하는지에 따라 경쟁의 승패가 달라질 것이다. 그것은 천재성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알파고 이후 바둑계가 무너질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실제 바둑 시장의 규모는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뛰어난 인간 스승이 없이도 인공지능을 이용해 높은 수준의 바둑을 배울 수 있어 바둑인은 전 세계적으로 늘어날 것이라 말했다. 그것은 먼저 온 미래에서 설령 AI라는 괴수가 우리에서 빠져나온다 해도 인간들은 그들대로 또 살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 읽은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의 책들을 고려할 때 나름 긍정적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뒷부분, 그래서 인간의 바둑은 AI와 비교해 무엇이 다른가? 는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감정, 예술성, 가치가 있다고 적었지만 작가 스스로도 확신하는 것 같지는 않다. 마지막 장에서 유발하라리가 넥서스에서 말한 것과 같은 위험성을 경고한다. 이 책을 9월에 읽고 이제 약 한 달이 지났는데 책의 결론 부분은 거의 기억에 남지 않았다. 다소 억지로 긍정회로를 돌려 "우리는 운명의 주인이다."라는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시를 인용하며 좋은 상상을 하고 우리가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실제 바꾸라고 말한다.
나는 차라리, "우리가 더 나은 지적 존재를 만들 수 있다면 우린 그들의 요람이 된 것으로 만족하고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이 도리" 라는 SF 소설가 듀나의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과학의 진보가 진화의 과정이라면 인간의 퇴화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전체 책에서 말하는 인간이 AI와 다른 중요한 가치가 솔직히 마음에 닿지 않았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암 투병 중인 아내를 위해 인공지능의 획기적인 발전을 염원한다. 묘하게 모순적인데 동시에 설득력있다. AI가 인간에게 이로움만 줄리없지만 우리는 결국 그것 앞에 무릎꿇고 또 인간의 생존과 애정의 욕구가 그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먼저온 미래를 좋게 읽었고 설령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작가의 배우자인 '김새섬 그믐 대표가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주세요!' 라고 나 역시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