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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NO 금쪽 처방

처방은 병원에서 상담은 상담실에서

by Lali Whale

가지고 있는 문제가 크고 다루기 어려울 때 누군가는 지레 질려버리고 또 누군가는 마음만 앞서 허둥댑니다. 노력하면 시간이 단축되는 일도 있지만 아무리 애써도 시간이 드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은 긴급 상담이라는 호출에 근무날도 아닌데 후다닥 출근을 했습니다. 마침 꽃구경 가려던 약속도 틀어져 시간이 나기도 했고요.


등교거부를 하는 아이 때문에 패닉이 된 어머님이 아이를 데리고 상담실에 왔습니다.


E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으로 수년간 우울감과 무기력감이 지속되었다고 얘기합니다. 학교 생활에서 큰 갈등은 없지만 친구들이 자신에게 뭔가 서운해하는데 자신은 왜 그런지 몰라 자꾸 눈치를 보게 되고 그러다 보니 학교에 있는 자체가 너무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공부는 해야 하는데 집중은 되지 않고, 몸은 여기저기 아프고, 선생님도 친구들, 부모님도 정말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이런 일이 오래되었지만 계속 참다가 지난해부터는 도저히 참기 어려워져 자해도 하고 결석도 잦았다고 얘기합니다. 지금도 학교에 가기가 두렵고 불편하고 꺼려지고 그러다 보니 부모님과의 갈등도 더 심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는 학교에 가고 싶지 않고 부모님은 어떻게 하면 학교에 가게 할 수 있을까 하여 둘은 다른 목적으로 상담에 왔습니다. 상담비용은 학교에 보내고 싶은 쪽이 내고 상담은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 쪽이 합니다. 참 어려운 경우죠.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진 두 사람을 모두 만족시켜야 이 상담은 지속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상담은 어떤 경우에도 상담을 받는 당사자의 목적에 맞춰가게 됩니다. 등교거부 같은 경우, 정말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학교에 가기 힘든 그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은 것인지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 경우가 안전에 직결된 이유라면, 등원보다는 안전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안전을 위협하지는 않는 다른 문제가 원인이 되어 결과적으로 학교에 가기 싫은 것이라면 그 문제를 다뤄 본 후, 자퇴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도록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청소년상담을 하면 일반 사람들보다 학교밖청소년이 되었을 때 청소년들이 겪는 어려움을 더 많이 더 깊이 알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의사결정에서 놓치기 쉬운 리스크를 고려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저도 이미 구세대 인지라 학교는 의례 가야 한다는 편견이 있고 그 생각에 고착되지 않도록 경계합니다. 하지만 상담 과정에서 많은 경우, 스트레스가 낮아지고 문제해결능력이 좋아지면 아이들은 학업을 '포기' 하지 않는 선택을 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학업에 더 집중하고 진로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과정 끝에 아이의 결정은 등원일 수도 있고 자퇴 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례에서는 등원 자체가 상담 목표라기보다는 대인관계 스트레스와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불신,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첫 번째 이슈이고, 그 후에 자신의 학업과 진로에 대한 의사결정이 두 번째가 될 것입니다. (물론 이 또한 상담이 진행된다면 내담자 본인의 우선순위에 의해서 바뀌게 되겠지만요.)


하지만 1회 차 상담에서 E의 보호자는 어떻게 하면 아이를 다시 학교에 가게 할 수 있는지 솔루션을 기대했고 그런 마법은 없다는 것에 적잖이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흔히 보는 육아 예능에서는 약 1시간 이면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여 솔루션을 제시하고 출연자들은 마법처럼 변화합니다. 물론 실제는 몇 달간 24시간 카메라가 붙고 미리 다양한 심리검사를 하고 충분한 사전 인터뷰를 하는 등 꽤 길었을 준비과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청자 입장에서는 문제의 원인과 솔루션만 알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단시간에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이제까지 원인과 방법을 몰라 허덕이고 힘들었을까요?

또, 전문가의 처방전이면 만병통치약일까요?


물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방법을 몰라 찾아왔고, 그 방법을 알면서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쑥 소화가 되는 그런 일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일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특히, 가족문제에서 아동이 아닌 청소년 이상의 연령이 되면, 부모의 금쪽같은 변화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자신만의 싸움이 있습니다. E가 사회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갈등과 오해, 학업과 진로에서 느끼는 좌절감을 부모의 지지나 도움으로 다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부모와 갈등이 적고 지지적인 관계라면 좀 더 안전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싸움에 집중할 수 있겠지요.


또, 문제의 해결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해도 쉽사리 적용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공부는 실제 하면 성적이 오르고, 친구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걸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싸우면 오해를 풀기 위해 대화하면 되고, 나에게 부당한 일이 생기면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자기주장을 해야 한다는 걸 우리는 유치원 때부터 배웁니다. 부모님들이 가장 답답해하는 것이 '공부 때문에 불안하면 그냥 공부를 하면 되는데 공부는 안 하고 불안해 만 하는 것' 이죠. 하지만 이런 자신과의 싸움은 방법을 알아도 시도와 유지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한 두 줄의 솔루션으로는, 하루 이틀의 노력으로는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상담에서는 결과와 해결방법을 정해주는 것이 아닌 싸움을 시작하기까지, 싸움을 하는 동안, 싸움이 끝나고 다음 목표를 잡는 것, 실패하고 또 일어서는 과정을 함께 하며 내담자 스스로 방법을 찾고 결과를 만들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국 "내 안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게 돕는 것"입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스스로 그것을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상담 본연의 목표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이런 솔루션은 매혹적이지 않습니다.


지금과 같은 설명을 다 드렸을 때 E의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그럼 상담이 끝나고 아이가 자퇴를 결심할 수도 있겠네요?"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것이 반드시 네/아니오로 답해야 하는 문제라면 '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자신에게 최선이라면 그렇게 선택할 수도 있겠지요.

E와는 서로 "다시 만나요." 하고 인사했지만 아직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다시 E를 만난다면, 무엇이 제일 힘든지, 그때는 어떤 마음인지, 그리고 그 마음을 E는 왜 그냥 꾹꾹 눌러왔는지 하나하나 꺼내 현미경으로 함께 쳐다보고 싶습니다. 인정해야 할 것을 인정하고 다독여야 할 것을 다독이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바꿔야 할 것을 바꾸며 마음을 만드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달라져야 할 행동들을 점검하고 그렇게 마음이 또 어떻게 달라지는지 볼 것입니다.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마음들을 그렇게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면, 그때 오롯이 "내가 정말 원하는 것,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또렷이 보일 테니까요.



* 본문의 사례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실제 사례를 재구성한 것으로 실제와는 다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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