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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Jul 10. 2023

나의 10대의 엔딩곡, 전영혁의 음악세계

Jethro Tull -Elegy (1985)

https://youtu.be/0uVSpN7SZSA 


이것은 무려 20세기의 추억이다.


디스크자키 전영혁은  <25시의 데이트>에서 <전영혁의 음악세계>까지 시간과 방송국의 변동은 약간 있었지만 1986년부터 20년간 "음악의 바다를 밝혀주는 새벽의 등대지기"(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36122) 였다.



나는 새벽 2시까지 음악을 듣기 위해 공부를 했던 것인지 공부를 하기 위해 음악을 들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전영혁의 음악세계는 나의 하루의 끝이며 또 시작이었다. 언제 부턴가는 그나마 2시에서 3시로 엔딩 시간이 바뀌면서 나의 공부시간은 더 늘어났다. 오프닝 곡인 신비로운 음률의 Art of Noise의 Moments in Love와 달리 엔딩곡인 Jethro Tull의 Elegy는 '쓸쓸하지만 괜찮아요"라고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방송 끝에 아저씨가 섬세한 목소리로 시를 낭송해 주셨는데 그때 Elegy는 매번 너무 찰떡이어 마지막까지 라디오에서 귀를 떼지 못하게 했었다. 전영혁 아저씨는 새벽의 푸른 밤을 음악으로 밝혀준 나의 뮤즈였다.


나의 학창 시절은 온통 공부였고 온통 음악이었다.


나야말로 좋은 대학에 못 가면 인생 망하는 줄 알았다. 철저히 TJ이 난 불안해하느니 차라리 10분이라도 더 공부하자 생각했다. 성적이 떨어지면 '왜 걱정하니 그냥 더 하면 되지.'가 나의 철칙이었다. 하지만 무식하게 읽고 풀고 외우기만 하니 뛰어나게 잘하지도 못했고, 재미도 없었다. 그저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해서 꾸역꾸역 쉬지 않고 했다. 여느 집이나 마찬가지로 우리 집은 엄마 아빠가 종종 싸우고 엄마는 1년이면 365일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 내가 엄마에게 걱정이 되지 않으려면 내 할 일을 잘하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음악이 있어서였다. 음악은 내 무채색의 삶에 미러볼이고 무지개였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와 AFKN 그리고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들으며 용돈을 모아 LP와 CD를 샀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언제나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도어즈, 비틀스, 레드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딥퍼플, 지미 핸드릭스, 제네시스, 클라투… REM과 라디오헤드, 섹스피스톨즈..


하루 끝은 언제나 전영혁의 음악세계였다.


중학교 때였다.

라디오 방송국 주소로 신청곡을 적어 엽서를 보내던 옛날이었다. 신청곡이 나오면 공테이프에 녹음하여 워크맨으로 반복해서 들었다.  전영혁의 음악세계로


 '작가가 꿈인데 여러 경험을 위해 전영혁의 음악세계 녹음실을 견학하고 싶습니다.'


라고 진지하게 아마도 구구절절 편지를 썼었다. 설마 진짜 허락하랴 싶었는데 아저씨가 진짜로 나를 초대해 주었다. 그 당시 송파에 살던 나는 물어물어 여의도 KBS 방송국을 찾아갔었다. 햇빛이 쨍한 여름, 가장 깔끔한 하늘색 셔츠를 입고 갔었다.


핸드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 편지와 집전화를 통한 약속 만으로 난 넓디넓은 방송국을 찾아갔다. 방송국 입구 밖에서 007 영화의 제임스본드가 들고 있는 것 같은 까만 서류가방을 든 그를 만났다. 하얀 피부에 마른 체형의 그는 현대소설 속 창배한 지식인 같았다. 서로를 찾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검정 가방 안에는 오늘 틀 CD가 가득 들어있었다.


새벽에 하는 프로그램이라 미리 녹음을 해서 제시간에 송출이 되는 방식 같았다. 아저씨는 스스로 모든 일을 다 하셨다. 온에어 부스 안에서 아저씨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든 장비를 혼자 다루고 음악도 틀면서 자신이 써온 스크립으로 멘트까지 다 하셨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보이는 라디오 같은 것이었다. 관람객은 나뿐이었다. 유리창 밖에서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직관했다.


하지만 정말 생각에 오래 남는 것은 아저씨와의 소소한 시간이었다.


녹음을 관람하고 KBS 방송국 직원식당에서 아저씨와 함께 밥을 먹었다. 식당에서 노각을 처음 먹어 보았는데, 오이 같은데 오이 하고는 달랐다. 오독하고 씹히는 식감이 있었다. 아저씨는 어떻게 노각을 모르냐고 나를 놀리듯 얘기했는데 수줍은 나에게 무슨 얘기라도 해주려 한 듯했다. 그런 후 아저씨는 나를 버스정거장까지 데려다주었다. 버스 정거장에서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아저씨는 내가 말라서 전봇대 뒤에 서면 되겠다고 농담을 건네며 버스가 올 때까지 옆에 있어주셨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횡단보도나 정거장에 서 있을 때면 나는 전봇대 뒤에 서서 아저씨를 생각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서서히 새벽에 깨어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홍대 골목의 시완레코드와 건대 앞의 레코드가게를 가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나의 10대가 갔다.


쓸쓸하지만 괜찮아요.

라고 Jethro Tull의 Elegy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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