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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밤에는 기형도를 읽자

기형도와 '입 속의 검은 잎'

by hardy


무릎 수술을 하고 고향 집으로 내려와 기거하며 가벼운 우울증을 앓았다.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서 계속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누구는 결혼하고 누구는 애를 낳았고, 누구는 승진했고 대학원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휴대전화를 통해 끊임없이 울렸다. 나만 뒤쳐지는 것 같고 몸이 아프니까 뭘 당장 할 수도 없고 나이먹고 가족들에게 민폐만 끼치는 것 같아서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암울한 나날 가운데 계속 읽었던 책이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 이었다. 특히 '진눈깨비'라는 시가 큰 위안이 됐다. 비루한 내 인생이 진눈깨비를 맞으며 집으로 향하는 한 사내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미묘한 안심이 전해졌다.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처럼 우리는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두가 힘든 날을 감내하며 살다가 언젠가는 이 고난이 지나가겠지 하는 희망을 품고 사는 것이다.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기형도, 진눈깨비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기형도는 요절해서 그의 작품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됐다고. 분노의 질주에 출연한 제임스 딘이나 시인 이상과 백석의 작품이 현재까지 회자되는 것도 그들의 스타성 혹은 문학성, 능력보다 그들의 불행하고 불꽃같은 인생 때문이라고. 일견 맞는 부분이 있다. 다만 기형도 작품의 스산함, 쓸쓸함, 때로는 현실을 날카롭게 비추는 현실감각은 세간의 폄하를 일순간에 잠재운다. 불우했던 어린시절의 초상을 넘어 낭만과 고독을 노래하던 기형도의 짧았던 삶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중앙일보 입사 동기들과 찍은 사진. 맨 왼쪽이 기형도 시인.


기형도는 1960년 3월 13일 태어나 1989년 3월 7일 별세했다. 서른 살 생일을 6일 앞두고 죽었다. 그는 황해도에서 교사를 하다가 월남한 부모의 3남4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면사무소 공무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토목 사업에 손을 댔다가 망했다. 생계가 어려워진 식구들은 경기 광명으로 이사해 농사를 지었다. 기형도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어머니와 누나들이 생계를 짊어졌다. 그는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며 빈집에서 홀로 지낼때가 많았다. 그의 시에 담긴 스산한 느낌은 이런 불우한 어린시절에서 비롯된 것 같다.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기형도의 두 살 터울 누나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집 앞 논두렁에서 성폭행당한 뒤 살해된 채 발견됐다. 2주 뒤 잡힌 범인은 남매가 함께 다니던 교회의 청년 신도였다. 당시 중학교 3학년생으로 사춘기 소년이던 기형도에겐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기형도는 ‘난 그날 이후 정서적으로 죽은 사람이야’라고 말해왔다. 독실한 크리스천이던 기형도는 이후 종교를 버렸고, 그 대신 염세적 실존주의 철학자라 할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의 철학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이후 기형도는 1979년 연세대에 입학했다. 이후 ‘연세문학회’에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시를 써나갔다. 방위병을 지내다 84년 10월 중앙일보에 입사한 그는 다음해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기자 출신 문인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더 기형도에게 흥미가 갔다. 멀게는 소설가 김훈, 가깝게는 장강명. 물 건너서는 조지오웰 등 기자 출신 문인들은 발로 뛰며 보고 겪었던 인상군상을 건져올려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사실을 어느정도 유지하면서도 적당한 가공을 거쳐 많은 사람에게 자신만의 이야기를 띄워 놓는다. 참 대단한 작업이다. 장강명 선배가 기자를 그만두고 위기감에 하루 5시간만 자고 계속 글을 썼다는 인터뷰를 보고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기형도의 기자시절은 어땠을까. 일반 기자들과는 좀 달랐다고 한다. 정규웅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신동아 지면에 회고한 내용이 재미있다. 사회부 기자였던 기형도는 문화부로 옮기면서 방송담당을 맡았다. 당시 방송은 제5공화국 정부의 앞잡이가 되어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은 방영하지 않았다. 기형도는 이런 방송을 매섭게 비판했다.


기형도는 곧 문학 담당을 맡게 됐다. 그는 물만난 고기처럼 뛰며 좋은 문학기사를 쏟아냈다고 한다. 문단의 대 선배들과 술자리를 함께하며 이름을 날렸다. 기형도는 술은 잘 하지 못했지만,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불렀다. 그림도 잘 그려서 술자리에서 종이에 문인들의 얼굴을 그려서 나눠준 적도 있다. 시를 쓰고 싶었지만 부모의 반대로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던 그는 그렇게 글쓰기의 욕망을 감추며 살아오다 문화부 기자로 일하며 삶의 방향을 정했던 것이다.


그는 특유의 결벽증이 심했다고 한다. 누군가 자신의 글에 토를 달거나 고치려고 하는 걸 원치 않았다. 기자로서 데스크의 데스킹을 거부했다고 하니 좀 문제가 많이 되긴 했었나보다. 그는 시인 박정만, 문학 평론가 김현(서울대 교수) 등과 교류하며 기자일 뿐 아니라 왕성하게 시를 써나갔다.


그러다 그는 죽었다. 뇌졸중 때문에 죽었다는 게 정설이지만 자살이라는 얘기도 있다. 파고다 극장에서 '뽕2'를 관람하다 기형도는 죽었다. 그는 아버지가 같은 병으로 앓다가 사망해서 나도 그 병 때문에 죽을 것 같다는 얘기를 종종 해왔다고 한다. 항간에는 그가 게이라는 설도 있었다. 실제로 그는 결혼하지 않고 사망했다. 다만 여류작가 K를 흠모하던 기형도의 생전 모습등을 비춰봤을때 이성애자라는 반론도 크다. 그는 시에서도 여성을 자주 언급했다.




내 기준으로 나눠보면 기형도의 시는 쓸쓸한 사랑의 서사가 한 축이다. 잃어버린 사랑, 아픈 사랑, 후회만 남은 사랑을 부여잡고 회고한다. 어리고 가난하고 못나서 놓쳤던 사랑을 속삭이며 본인을 자책한다. 결벽적으로 집착하는 성격이었건만 관계에 있어 서툴렀던 것으로 알려진 시인의 모습이 녹아있는 듯 하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 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 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는 기자답게 사회현안을 담은 시도 여러 개 남겼다. 최근 들어서 주목받는 시가 하나 있다. 바로 '홀린 사람' 이다.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기형도, 홀린 사람


일반 대중,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이의 합리적 의문도 허용하지 않는 비이성적인 ‘군중’과 권력자의 옆에서 아첨하는 ‘사회자’의 모습. 굳이 박정희 시대 독재 정권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기형도가 그려낸 상황이 벌어지고 있진 않은가.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 넘쳣다

택시 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기형도, 잎속의 검은 잎


독재 정권, 억압된 현실에서 침묵을 강요하는 폭력과 불안함, 입을 다물어야 하는 소시민적 감성을 속도감있게 그려내고 있다.




형식에만 집착하는 종교인들, 신자들을 비판한 시도 있다.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 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기형도, 우리동네 목사님


이 시는 김훈이 한겨레 기자 시절 썼던 '라파엘의 집' 칼럼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겉으로만 관용을 외치는 종교인과 사회 지도층의 위선을 날카롭게 꼬집은 작품들이다.




나는 기형도 작품에서 쓸쓸함과 사회 고발보다 불안함에 주목한다. 그의 작품엔 '안개' 혹은 앞이 안보이는 캄캄함을 묘사하는 부분이 자주 등장한다. 명문대를 나와 기자로서 엘리트의 삶을 살았지만 그 근원에 도사리는 불안감, 자기 혐오, 위기감과 섬세함이 더 컸다. 그의 삶은 불우했던 유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불우했기에 더 날카롭고 디테일한 작품을 쓸 수 있었다. 슬프지만 예술가에게 고난은 좋은 작품을 위한 윤활류다. 개인의 삶은 불행해지지만 그가 남기는 예술의 수준과 깊이는 한층 올라간다.


내가 기형도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허세가 없다. 빙빙돌리지 않고 직설적이며 솔직하다. 그리고 천재였지만 동시에 나와 같은 일반인처럼 느껴진다. 고독하고 불안하고 외롭고, 인싸같은 삶을 살았지만 철저히 아싸였고 인싸가 되고 싶어 노력하지만 잘 안되는 모습. 그의 작품에선 그의 처절했던 삶이 보인다. 그래서 안쓰럽고, 또 공감이 가는 것이다. 고은처럼 막 던지는 시가 아니고 고민하고 또 고민한 흔적이 그의 작품에 알알이 새겨져 있다. 젊은 청년의 고민이다.


그래서 오늘같이 춥고 쓸쓸한 밤에는 기형도를 읽는다. 그가 외롭게 쓰려졌을 그 영화관의 스산한 공기를 떠올린다. 그가 단 한순간이라도 행복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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