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고 힘들때마다 읽는 수필이 있다. 돌아가신 장영희 교수님의 '괜찮아'란 작품이다.
초등학교 때 우리 집은 제기동에 있는 작은 한옥이었다. 골목 안에는 고만고만한 한옥 네 채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 골목길만 초등학교 아이들이 줄잡아 열명이 넘었다. 학교가 파할 때쯤 되면 골목 안은 시끌벅적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친구들은 대부분 술래잡기, 사방치기, 공기놀이, 고무줄넘기 등을 하고 놀았지만, 다리가 불편한 나는 공기놀이 외에는 어떤 놀이에도 참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골목 안 친구들은 나를 위해 꼭 무언가 역할을 만들어 주었다. 놀이에 참여하지 못해도 나는 전혀 소외감이나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다.
하루는 우리반이 좀 일찍 끝나서 혼자 집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깨엿장수가 골목길을 지나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가위만 쩔렁이며 내 앞을 지나더니, 다시 돌아와 내게 깨엿 두개를 내밀었다. 순간 아저씨는 아주 잠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는 몰랐다. 돈 없이 깨엿을 공짜로 받아도 괜찮다는 것인지, 아니면 목발을 짚고 살아도 괜찮다는 것인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그날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런 대로 살 만한 곳이고, 좋은 사람들이 있고, 선의와 사랑이 있고, "괜찮아"라는 말처럼 용서와 너그러움이 있는 곳이라고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난 내 마음속에서 작은 속삭임을 듣는다. 오래전, 따듯한 추억 속의 골목길 안에서 들은 말. "괜찮아!" "괜찮아"는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말이다.
장영희, 괜찮아 中
이 짧은 수필안에서 장영희의 어린시절이 생생히 느껴진다. 그는 장애가 있었지만 그를 생각하고, 배려해주는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내려놓지 않고, 살아갈 희망을 주는 든든한 응원군이 많았다. 어린 소녀는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다. 그의 글은 반짝반짝 빛난다. 그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배운자들이 흔히 쓰는 어려운 말도, 거창한 형용사도 없다. 그냥 본인이 보고 느낀 걸 담담하게 꾸밈없이 적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는 최근 일부 인기 작가들처럼 애써 순수하거나 맑은 척 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 자체가 어린아이처럼 한없이 투명하고 때묻지 않았다. 싱그러운 웃음과 다정한 눈동자, 그보다 더 따뜻한 글로 세상을 밝히다 먼저 떠난 장영희 선생님에 대해 꼭 한번 글을 써보고 싶었다.
장영희는 한국 영문학의 역사, 번역문학의 거장이었던 장왕록 박사의 여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첫돌을 앞둔 때 장영희 교수는 심한 고열에 시달렸고 소아마비 판정을 받았다. 이후 평생을 목발을 짚고 살아야 했다. 또 오른손이 마비돼 왼손을 썼다. 아버지는 딸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교육뿐이라고 믿었다. 일반인과 같은 학교에 다니도록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초등학교 이후 상급 학교들은 장영희 교수의 신체적 장애를 이유로 입학시험 치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장왕록 박사는 일일이 학교들을 찾아다니며 사정했지만 거절당했다.
장 교수는 어렵사리 중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도 여차저차 졸업했지만 대부분의 대학들은 장애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장영희가 입학시험 치르는 걸 거절했다. 장왕록 박사는 서강대학교 영문과에 재직하던 브루닉 신부를 찾아갔다. 미국인 신부는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보지 말라는 법은 없다"며 입학시험 자격을 줬다. 장영희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박사과정에도 응시했는데 면접장에서 "장애인은 안 받는다"는 냉담한 평가를 받았다. 그는 결국 1978년 뉴욕주립대로 유학을 떠났다.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모교인 서강대에서 강사를 했고, 교수가 됐다. 2001년 안식년을 맞은 장영희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1년간 초빙교수 생활을 하는데 이 시기에 암이 발견됐다. 이후 그는 3차례에 걸쳐 암수술을 받는다.
장왕록 박사와 장영희 교수
장영희에겐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장애인이라는 편견으로 똘똘 뭉친 사회 분위기는 한국도, 외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미국 보스턴에서 7층 높이의 아파트에 살았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나 3주간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해졌다. 그는 아파트를 관리하는 부동산 회사에 다른 아파트로 옮겨달라고 요구했고, 회사는 이를 거절했다. 장영희는 굴하지 않고 부동산 회사와 싸웠고 결국 보상을 받았다. 그의 이웃들은 따뜻했다. 80세의 어떤 할머니는 그녀가 계단 오르는걸 힘들어하는 걸 보고 911에 신고해 도와주기도 했다. 장영희는 일련의 사건들은 불행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그 할머니를 만날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고 적었다.
그의 유학생활에도 불행이 꼬리를 물었다. 몇년에 걸친 논문을 어떤 도둑이 훔쳐간 것이다. 집을 털렸는데 논문도 같이 사라졌다. 엉덩이에 종기가 날 정도로 숱한 밤을 세우며 공들인 논문이었다. 꼼짝없이 누워서 일주일을 보낸 그는 창가로 햇살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괜찮아, 논문쯤이야. 다시하면 되지.." 어린시절 엿장수가 가르쳐준 '괜찮아'라는 마법이 다시한번 힘을 발휘했다. 그는 1년간 논문에 다시 매달렸고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그의 논문 첫 페이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다. "내 논문 원고를 훔쳐 가서 내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도둑에게 감사합니다"라고.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고통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낙심하지 않고 이겨내며, 원하는 바를 이뤄냈다. 그는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고 했다. 그의 꾸밈없는 글이 사랑받았던 것은 이런 희망의 메세지가 알알이 녹아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몸은 아프지만 지치지 않는 그의 모습,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그에게서 독자들은 희망을 보았다. 언론들은 2005년 그가 척추암 수술을 받고 6개월만에 복귀하는 수업 현장을 찾았다. 교수가 학교로 돌아오는 모습을 취재하는 건 이례적이다. 그만큼 장영희가 지치고 힘든 우리 국민들에게 전하는 울림이 작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장영희 교수는 취재진에게 "포기할 수 없어요. 죽을 때까지 함께 있을 제자들이죠. 제가 죽어 제 관을 나를 사람도 제자들이 될 거예요"라고 했다.
장영희 교수는 2006년 두 번째 암 투병을 이겨낸 뒤에는 이렇게 썼다.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 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라고. 그는 결국 2009년 우리의 곁을 떠났다.
장영희 교수가 지난 2005년 3월 척추암으로 강의를 중단한 지 6개월 만에 강단에 복귀하며 제자들의 환영을 받던 모습.
장영희 교수의 작품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초원의 빛과 물오징어'다. 그는 친구의 편지 형식을 빌려 중년 여성들의 마음을 적어내려간다. 어릴적 꿈은 이제 추억이 됐지만 소중한 가족 덕분에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고.. 장영희의 글은 세심하다. 일부러 세상에 눈감는 예쁜 글이 아니고, 괜찮다며 모두를 안아주는 포옹의 글이다.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다.
오늘 오후 막내가 다닐 재수학원을 알아보러 시내에 나갔다가 오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러서 물오징어 몇 마리와 빨간 고추를 샀지. 아침에 사소한 일로 애 아빠랑 싸웠는데 그 사람이 좋아하는 오징어 볶음이라도 하려고 말이야. 막내를 낳고 나서 난 이상하게 빨간 고추 알레르기가 생겨 재채기를 하기 때문에 비닐 봉투로 겹겹이 싸들고 집으로 왔단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다가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어. 하늘은 너무나 파랗고, 햇볕은 밝고 투명하고, 아파트 뜰의 나무들에 벌써 초록색 물이 오르고... 나도 모르게 '아 봄이로구나!'하고 탄성이 나왔지.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어. 찬란한 봄볕속에 서서 물오징어 보따리 들고 계속 재채기를 해대는 여자, 그게 바로 나라는 사실이. 아니, 봄이라는 것을 느껴본 것도, 아파트 뜰에 있는 벚나무를 본 것도 정말 얼마 만인지 몰라. 꼭 시인이 되고 싶었던 문학소녀 김민숙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하루하루 이리저리 치대고 까불리며 껍데기만 남은 김민숙만 있는거야...
그런데 참 이상하지? 지금 내 삶이 척박하고 힘들어도 누군가 내게 별과 꿈을 노래하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겠느냐고 물으면 아마도 쉽게 그러겠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아. 지금의 내 삶이 가치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물오징어 삶는 내 손이 부끄럽지 않고, 저녁이면 다시 돌아올 가족이 있고. 그래, 난 기억해. 그 시의 다음 구절을.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 시절이 돌아오지 않은들 어쩌리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남아있는 것에서 힘을 얻으리...
장영희, 문학의 숲을 거닐다 中 '초원의 빛과 물오징어'
장영희는 소수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버리지 않았다. 본인이 당했던 차별과 편견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는 "장애인이 '장애'인이 되는 것은 신체적 불편 때문이라기보다 사회가 생산적 발전의 '장애'로 여겨 '장애인'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신체적인 능력만을 능력으로 평가하는 비 장애인의 오만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장영희는 세상에 대해 저주와 악담을 퍼붓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마냥 비관하지도 않았다. 그는 암으로 입원했을 때 이렇게 적었다. "입원한 지 3주 째, 병실에서 보는 가을 햇살은 더욱 맑고 화사하다. '생명'을 생각하면 끝없이 마음이 선해지는 것을 느낀다. 행복, 성공, 사랑 ― 삶에서 최고의 가치를 갖고 있는 이 단어들도 모두 생명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한낱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살아 있음'의 축복을 생각하면 한없이 착해지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 벅차다"고.
입원 후 나흘 뒤 통증이 완화됐다. 장영희는 다리 보조기를 신고 일어서 창가를 내다봤다. '문득 내 발바닥이 땅을 딛고 서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강한 희열이 느껴졌다. 직립인간으로서 직립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누워서 보는 하늘이 아니라 서서 보는 하늘은 얼마나 더 화려한지…." 더 얻고, 더 갖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현재에 감사하라는 교훈을 마음으로서 전달하고 있다.
그녀의 오빠 얘길 하나 더 해야겠다. 세상을 향한 장영희의 따뜻한 시선이 있기까진 가족들의 도움이 컸다. 아픈 딸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다정한 아빠 뿐 아니라 동생을 항상 업고다닌 오빠의 헌신이 장영희를 키워냈다. 오빠 장병우 씨는 소아마비로 두 발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장영희를 항상 업고 다니며 도왔다. 장영희 교수는 "나보다 여섯 살 위인 오빠가 나를 '담당'했는데, 학교에 있는 시간만 빼면 항상 나를 업고 다녔다"고 했다. 또 장 교수는 생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감수성을 키워준 인물이 어릴 적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주던 오빠인 장병우씨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대엘레베이터 대표를 역임한 장병우 씨는 장영희 교수 10주기 추도식 참석 직후 급성 뇌출혈로 별세했다.
장영희 교수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장 교수의 오빠 장병우 대표.
장영희 교수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그는 말한다. “저는 학창 시절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이 창경원이었습니다. 소풍 때마다 학교에서는 창경원에 갔는데, 그때마다 저는 소풍을 못 가고 늘 집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며 얼마나 답답할까, 또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없으니 경험이 부족할 거다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동성 있게 돌아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책을 많이 읽었고, 그 덕분에 남이 가보지 못한 세계까지 경험할 수 있었어요”라고.
나는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가. 내 손에 넘치는 과분한 것들을 보지 못하고 남의 것만 시기하고 살진 않는가. 또 하나, 남에게 아름다운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 나를 보며 삶의 희망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장영희가 남기고 간 것은 이것일 것이다. 우리는 희망을 보면서 살고 있는가.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거라고 믿고 있는가. 장영희 교수님, 그립습니다. 날선 언어와 증오, 혐오, 갈등이 곰팡이처럼 피어나는 매일매일에 장영희 선생님 같이 희망과 화합을 말하는 목소리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