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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Jun 08. 2020

여의도


여의도 직장인을 꿈꿨다. 대학생 시절 우연히 KBS 방청을 왔는데 시간이 좀 남아서 여의도 공원을 한참 돌아다녔다. 물론 아재들도 많았다만 젊고 파릇한 정장 차림의 직장인이 그렇게 부러웠다. 회사 ID 카드를 셔츠 왼쪽 주머니에 눌러넣고 한껏 매만진 머리를 찰랑대며 한손엔 스타벅스 커피를 든 직장인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공원을 돌았다. 공원 저편으로 우뚝선 건물들이 보였다. 화사한 신록 사이로 위용을 뽐내는 회색 금융사 건물을 보면 기가 죽었다. 나지도 않는 돈 냄새가 났다. 꼭 성공해서 저들처럼 여의도 일대를 누비고 싶다고 생각했다.


난 금융사 직원만큼 돈을 벌진 못하지만 그래도 여의도 직장인이 되긴 됐다. 입사 8년만에 처음으로 회사 내근을 하고 있다. 오전 8시 버스를 타고 20분쯤 여의도 환승센터에서 내린다. 새까만 정장을 입은 남녀 직장인들이 버스에서 우수수 쏟아진다. 여의도 공원과 IFC 몰을 잇는 환승센터 신호등은 신호가 길다. 증권사나 투자회사, 금융감독원 직원들은 횡단보도 오른쪽으로 향한다. 동여의도 사람들이다. 나는 반대편, 수출입 은행과 산업은행 쪽으로 걷는다. 아침 댓바람의 여의도공원은 참 맑고 푸르다. 사람들은 공원을 가로질러 각자의 직장으로 걷는다. 지각한 사람들은 공원 내 숲길을 뛴다. 또각또각하는 구두소리가 지저귀는 새소리를 뚫고 나온다. 누구 한 사람이 뛰면 그 다급한 마음이 출근 동지들에게 전파되어, 괜히 나도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KBS나 우리회사처럼 언론사 사람들. 혹은 국회에서 일하는 보좌진들은 서여의도로 간다. 금융쪽 사람들, 금융 출입기자들과는 정반대다. 여의도 쪽엔 여론조사 기관이나 회계 회사 등도 많다. 여의도에선 편안한 캐쥬얼 차림이 드물다. 칼같은 정장 차림이 많다. 나는 굳이 정장을 안 입어도 되지만 가끔 약속이 없어도 갖춰입고 나올 때도 있다. 이 곳에서 청바지는 약간 겉도는 느낌을 준다. 괜히 위축되지 않기 위해 일주일에 1~2번은 정장을 입는다. 



아침의 여의도 거리는 밥짓는 냄새로 가득하다. 새벽 6시만 되면 김밥과 샌드위치를 파는 노점이 즐비하다. 한국 거래소와 한국노총 건물 사이가 가장 많다. 회색의 은박지로 포장된 김밥은 2000원 선이다. 신용카드가 안 되는 노점이 많다. 새벽같이 나오는 직장인들은 그 김밥과 샌드위치를 사서 먹으면서 회사로 간다. 


여의도의 피크는 점심시간이다. 11시30분만 되면 서여의도든 동여의도든 점심을 해결하려는 이들로 복작댄다. 사실 별로 밥 먹을 곳이 없다. IFC몰은 쉬운 선택인데 파스타 같은 비교적 젊은 메뉴보다 김치찌개, 샤브샤브 같은 전형적인 메뉴가 인기가 많다. 서여의도 유일한 냉면집인 정인면옥은 한겨울에도 미어터진다. 점심부터 소고기를 굽는 접대 자리가 있는가하면 샐러드집은 혼자온 젊은 직장인으로 붐빈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주머니들의 손길도 바쁘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여의도 밥집은 금방 망한다. 신기할 정도로 금방 망한다. 잘 가던 서여의도 복어요리집이 사라져서 깜짝 놀랐다. 비싼 곳이지만 국회의원이나 유명인들이 많이왔는데 한 연예인의 부모가 차렸다는 소문도 돌았던 집이었다. 주인 할머니는 항상 "복어 팔아서 먹고살기가 참 힘들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디서 복어를 팔고 계실지 궁금하다. 


상사와 피곤하게 점심을 같이 먹고 싶지 않은 이들은 햄버거나 샌드위치, 김밥을 사서 한강공원이나 여의도공원으로 나간다. 최근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공원 벤치에 누워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30대 정도로 보이는 직장인을 보았는데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여의도공원이 없었다면 차가운 여의도는 한층더 비인간적인 곳이 됐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점심을 먹고 여의도공원을 도는 사람들은 대부분 웃고 있다. 왁자지껄 떠들면서 주위 눈치보지 않고 웃는다. 정장에 운동화를 신은 흰 머리의 중년들도 서로 웃고 떠들며 공원을 돈다. 전속력으로 걸으면 공원을 한바퀴 도는데 30분 정도 걸린다. 공원 한쪽에선 젊은이들이 농구를 하고, 막간을 이용해 데이트를 하는 커플도 있다. 모두가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최대한 즐기려는 듯이 웃고 걷고 뛰고 떠들고, 혼자 쉬고 눕고 한다. 



공원만 붐비는 건 아니다. 일하느라 고장난 몸을 고치기 위해 마사지샵이나 병원을 찾는 직장인이 많다. 사우나도 사람이 많았는데 요새는 코로나때문에 별로 없다. 한때 잠까페가 성행했다. 5000원에서 1만원을 내고 1시간 자는 것이다. 여의도 IFC 몰 내 CGV에서도 상영관 하나를 비워서 신청하는 직장인들이 와서 잠을 자도록 했다. 기사로 나올 정도로 유행했는데 요새는 다 사라졌다. 헬스장과 필라테스 학원, 요가학원도 직장인으로 북새통이다. 참 열심히들 사는구나 싶었다. 


직장인들은 점심을 먹고 다시 밀물처럼 회사로 들어간다. 금융감독원과 거래소 앞에서 집회를 하는 이들을 지나쳐간다. 세월이 흐르며 금융당국의 역할이 바뀌지만 억울한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수두룩하다. 돈 만지는 사람들은 ‘세력’의 주가조작 의혹을 부르짖거나 금융당국의 무관심을 규탄하는 사람들을 무심코 지나쳐간다. 검은 양복부대 속에 빨간 완장과 머리띠를 한 사람들은 퍽 눈에 띈다. 그들이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금액은 몇 억원 선이다. 그 복잡한 사연을 듣기엔 내 경제지식이 너무나 얄팍하다. 목놓아 외치는 그들곁 도로에는 연신 까만색 외제차가 지나간다. 63빌딩 앞에도 수많은 외제차가 서 있다. 1시간만 서 있어도 유명인 두셋은 지나간다. 포럼과 기업설명회가 끊이질 않는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오후 6~7시. 여의도의 불이 켜진다. 점심때와 같이 사람이 많지는 않고 대부분 업무 저녁이다. 남도 음식점, 횟집, 해물탕집, 한우집이 문을 연다. 1차로 부족한 이들은 포장마차로 향한다. 분명 낮에는 없었는데 마법처럼 그 자리에 포장마차가 있다. 라면과 오돌뼈를 시켜놓고 소주 한잔에 썰을 푼다. 우리 영감님이 어쩌고, 기레기들이 어쩌고, 주가가 어쩌고, 남부지검 증권범죄합수단이 어쩌고.. 귀가 간지럽다. 오후 11시쯤 되면 택시가 안 잡힌다. 국회 앞까지 걸어가서 손을 뻗어보지만 씽씽 그냥 지나간다. 비틀거리는 아저씨들은 넥타이를 반쯤 풀어헤쳤다. 여의도는 밤만 되면 유령도시가 된다. 토하는 사람, 노상방뇨하는 사람들도 팔자 걸음을 걸으며 여의도를 빠져나가려고 연신 손을 뻗는다. 


뮤직뱅크 녹화가 있는 날이면 버스가 더 막힌다. 수많은 팬들이 KBS 앞에서 진을 치고 아티스트를 기다린다. 버스 기사는 혀를 찬다. 다만 오빠나 누나가 탄 검은색 밴을 따라 온힘을 다해 뛰며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의 모습에 이상하게 힘이 났다. 그들의 뜀박질은 자유로워 보였다. 진심을 다한 움직임이었다. 하루에 찌든 직장인들은 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집으로 간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지금 이시간 여의도에서 일하는 사람 가운데 내 연봉은 몇위 정도 될까. 워낙 고액연봉을 받는 이들이 즐비한 욕망의 도시 여의도에서 나는 과연 몇등이나 될까. 그래도 내가 쓴 기사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이 있긴 하겠지. 그걸로 정신승리하며 10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간다. 정신 놓고 여의도 환승센터 의자에서 자고 있는 중년의 남성을 마음속으로 응원하며. 짠한 우리 노동자들 내일은 더 좋은 일만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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