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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Jan 25. 2022

대통령님 기자회견 하시지요


대한민국 모든 기자단 가운데 청와대 출입만큼 정부와 공직자의 양해를 잘 수용하고, 이해하는 곳도 없을 것이다. 국가 안보, 외교 관례, 국정 운영 차질, 국민 불안 등 숱한 이유를 들어 청와대는 많은 사안을 비공개하고, 보도를 막고, 엠바고를 건다.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다. 국가 컨트롤 타워인 청와대에는 민감한 사안과 업무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청와대 생활을 1년만 해보면 실제로 기자가 할 수 있는 영역이 매우 좁다는 걸 체감하게 된다. 1급 기밀인 대통령 일정을 미리 알아내도 청와대에 써도 문제가 없다는 걸 미리 확인하고 내보내야 한다. 청와대 참모에게 들은 내용을 안에 보고했는데 윗분들이 쓰자고 하면 "이 기사가 나가면 제가 말해준 참모가 공직기강 조사를 받고 피해를 입게 된다"고 필사적으로 막은 경우도 많다. 


청와대라는 특수한 기관에서 기자들은 그렇게 대통령과 참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새로운 기사를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니 대통령이 소리 소문없이 소방관 영결식에 다녀오고, 탁현민이 이를 뒤늦게 자신의 SNS에 올려 홍보해도 별 말이 나오지 않는다. 멀쩡한 행사가 갑자기 빠지고, 내기로 했던 브리핑을 4시간이 지나서야 "안 하겠다"고 공지해도 기자들은 따를 수 밖에 없다. 


사건팀만 4년 가까이 하다 정치부에 온 나는 이 모든게 처음엔 잘 이해가 안 되었으나, 곧 적응했다. 가끔 정당 말진들이 아는척을 하며 출입처에 갑질했다는 썰이 들려올때마다 "청와대 한 달만 있어보면 정신 차릴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24일 신년 기자회견을 취소했다. 임기 중 처음이다. 회견은 원래 27일로 예정돼 있었다. 박수현 소통수석의 브리핑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그럴수 있지, 생각했다가 좀 놀랐다. 너무 청와대 눈치를 보다보니 그들의 논리에 무의식적으로 동조하게 된 것 같다.



청와대는 오미크론 대응에 집중하겠다는 명분을 들었다. 따져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1시간 30분~2시간 가량의 기자회견을 안 한다고 오미크론 대응에 미비한 점이 생기나. 문 대통령은 중동 3개국 순방을 떠날 때부터 국무총리에게 오미크론 확산 방지를 위한 총력 대응을 주문했다. 보건복지부 중대본 총리실 질병관리청이 계속 실무 작업을 하고 있다. 코로나가 위험하면 지난해처럼 온라인으로 회견을 하면 된다. 근데 그 짧은 시간조차 낼 수 없다고? 변명 거리가 될 수 없다. 


지난해 말부터 청와대 내부에선 신년 기자회견을 할 경우 내세울 성과가 없다는 우려가 많았다. 중동 3개국 순방 직후 회견을 하고 임기말에도 방산 원전 협력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는데 생각보다 성과가 미비했다. 참모들은 당장의 성과보단 미래를 위한 씨앗을 뿌렸다고 자평했지만 순방 직후 회견에서 짜잔하고 제시할 거리가 없다고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굳이 순방 뿐 아니다. 북한은 핵실험과 ICBM 재개를 시사했다. 기시다 일본 행정부와의 관계는 여전히 살얼음판이고 중국과도 접촉이 이어지지 않고 있다. 부동산 고공행진은 여전하고 조해주 선관위 상임위원 사퇴 과정에서 불거진 캠코더 인사의 문제도 남아있다. 임기말까지 일하는 정부가 되겠다고 수차례 강조해 온 문 대통령이 이런 난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아니, 4개월밖에 남지 않은 임기 동안 해법의 실마리를 어떤 식으로 찾을 것인지 국민들은 궁금해 하고 있다. 임기 말에도 40%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대통령의 생각에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기자회견을 안 한다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청와대 출입기자로서 나도 마지막 기자회견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나는 기자지만 많은 국민들을 대표해 대통령께 질문을 드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전국민 앞에 생중계 되는 그 자리에 대한 부담이 매우 크다. 기자들도 예상 질문을 뽑고, 어떤 말투와 어떤 빠르기로 질문해야 깊이 있는 대답이 나올 수 있는가 연구한다. 물론 많은 시청자는 질문의 객관적인 수준을 떠나 각자의 정파나 정치적 호오에 따라 무조건 기레기라고 또 욕을 박겠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그냥 내가 생각할때 중요한 현안에 대해 대통령의 생각을 덤덤히 물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도 날아가게 됐다.


이 정부의 소통 방식에 대해 말하고 싶다. 언론앞에 많이 스는 것이 소통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고 대통령에게 개인 민원을 줄창 해대고, 시장 바닥을 연출한 국민과의 대화가 소통의 정답은 아닐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5년 간 7차례의 기자회견과 2차례의 국민과의 대화를 포함해 총 9차례 대중 앞에 섰다. 국민 기대에 턱없이 부족하고 미비한 횟수다.  



청와대 참모들은 이를 대통령의 신중한 성격 때문이라고 포장한다. 대통령은 회견을 앞두고 몇주간 예상 질답을 뽑아보고 준비한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날 것의 생각을 공식석상에서 자주 밝혀 공격의 빌미가 된 것을 당시 비서실장으로서 바로 옆에서 지켜본 여파도 있는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오미크론과 회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정국인지는 정말 모르겠다. 회견에 나와서 오미크론에 대한 국민 불안을 잠재우고 임기 말에도 열심히 일하겠다는 뜻을 생생하게 국민에게 전달하면 어떤가. 신중함을 넘어서 답답한 수준이다. 회견마다 문 대통령은 유창한 말솜씨로 정국 구상을 분명하게 밝혔다. 듣다보면 고개가 끄덕이는 구절도 많았다. 그런 소중한 자리를 스스로 없애는 선택을 한 게 참 답답하다.


대통령은 대선 이후 퇴임 소회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한 차례 할 예정이라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국민 누가 그때는 떠나는 대통령에게 관심이 있겠나. 회견이라기 보단 고별 행사 정도가 될 것이다. 이대로 정권이 끝난다면 문 대통령은 이명박 보다도 소통을 거부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공산이 크다. 아무리 지지층이 몰려와서 지적한대도 데이터가 말해준다. 


그래서 난 가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립다. 말실수도 많이하고, 기자들과도 수차례 싸우기도 했지만 그 가운데 느껴지는 인간적인 진심을 보았다. 너무 소통해서 문제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숨고 피하고 하는 것보단 나은 듯 하다. 난 다음 대통령은 좀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자신감 있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책임질 건 지고 하는 그럼 인사가 청와대에 들어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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