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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Feb 04. 2022

'RE100'과 대통령의 조건


정몽준의 버스비 발언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2008년 6월 27일 당시 한나라당 전당대회 출마 후보 간 치러진 생방송 토론회에서 정몽준은 '버스 요금이 얼마인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고 "한 70원쯤 하나"라고 답했다. 당시 버스요금은 1000원이었다. 


여론은 뒤집혔다. 서민의 발인 대중교통 요금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당 대표를 할 수 있느냐는 비판이 일었다. 정몽준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재벌 기업인 현대家 사람이라는 점도 이런 여론에 한 몫을 했다. 이후 정몽준은 돼지고기 한 근, 배추 한 포기 등 생활물가를 꼼꼼하게 숙지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3일 대선 후보 토론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게 던진 'RE100' 용어가 낳은 파장을 보면서 또 한번 지도자의 자질 문제가 떠올랐다. 에너지 대전환은 전 세계적 과제인데 그 시대적 흐름을 대표하는 용어도 모르면서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는 비판과 RE100을 아는 사람이 몇명이나 되겠느냐는 방어가 첨예하다. 


둘다 맞는 말이라 한쪽 편을 들기 어렵다. 사실 정파에 가려 지도자의 조건 자체는 이미 뒷전이 되었다. 그냥 취준생이 외워야 할 시사용어 하나만 늘어난 느낌이다.


아무리 정치가 신물난다해도, 대선 후보 토론 합계 시청률이 39%를 기록할만큼 국민들은 차기 대통령에 관심이 많다. 갈수록 삶이 팍팍해지고 희망이 사라진대도 보다 좋은 사람이 향후 5년 간 나라를 이끌 지도자로 선출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 터다.


자연스레 질문이 따라 붙는다. 과연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가? 여러 덕목이 있을 것이다. 높은 도덕성과 뛰어난 행정능력, 개혁을 향한 갈망과 정책을 실행할 추진력 등. 이 가운데 이번 RE100 해프닝이 보여주듯 똑똑하고 스마트한 정치인, 현실 감각이 있는 대통령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견 맞는 말이다. 국민들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고 이를 해결하려면 어떤 법과 제도를 손봐야 하는지, 이를 위한 재정 규모는 얼마이며 정부가 어떻게 뒷받침 해야 하는지 청사진을 갖고 있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서민들이 부동산으로 허덕이는데 청약 점수 만점이 몇 점인지 몰랐던 윤석열은 좀 심하긴 했다. 그러나 RE100도 모르느냐며 맹공하는 여당 일각의 모습은 무당파 혹은 캐스팅 보터로서 아직 표심을 정하지 않은 많은 이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온 국민이 아는 버스비를 몰랐던 정몽준에 쏟아졌던 비난이 나오지 않는 것은 RE100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는 방증일 것이다.   



후보도 사람인지라 모든 사안을 숙지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 뛰어난 전문가를 잘 선별해서 등용하고 주위에 두고 귀를 열고 끊임없이 소통하며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 혼자 독학해서 얇고 넓게 아는 것은 많은데 오히려 그렇다고 독선에 빠져서 전문가의 조언을 무시한다? 그러면 더 큰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 그러니 지도자는 똑똑하고 스마트한 동시에 열린 마음으로 경청할 수 있는 인성을 갖춰야 할 터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문 대통령은 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을 했다. 국회의원 경험도 있고, 변호사로 일해서 법을 매우 잘 안다. 시민사회 활동도 했다. 아마 대한민국 역사상 분야를 가리지 않고 가장 경험이 많은 정치인일 것이다. 


청와대 참모들은 하나같이 문 대통령의 날카로운 질문에 당황한 적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어떤 사안을 보고했는데 오히려 대통령이 자신보다 많이 알고 있어서 놀랐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보고를 잠시 중단시키고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해서 향후 추가 보고를 한 적도 많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밤늦게까지 자료를 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라온 자료를 꼼꼼히 읽고 메모한다. 


원래부터 경험이 많았는데 5년 간 계속 공부를 해 왔으니 국정 전반에 대한 지식이 개별 참모보다도 월등하다는게 청와대 참모들의 증언이다. 임기 말 대통령 지지율이 이례적으로 40%를 넘기고 있는 것은 공부하는 대통령의 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 정권이 마냥 성과만 낳은 것은 아니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서울과 수도권 집값은 참여정부 때만큼이나 폭등했다. 김수현 전 정책실장을 포함한 부동산 전문가들이 정책을 지휘했는데도 그랬다. 정부가 부동산 문제의 해법이라 내놓은 대규모 공급 대책은 임기 중반을 넘겨서야 나왔다. 


민정수석을 맡아 인사문제를 책임졌음에도 문 대통령 재임 기간 야당의 동의를 얻지 않고 청문회 보고서를 받지 않은 채 임명을 강행한 장관급 인사는 34명에 이른다. 야당의 몽니 때문이라고 지적할수도 있겠지만 내정 이후 청문회 과정에서 국민이 납득하지 못할 만한 흠결이 나타난 인사도 부지기수다. 많이 알기에 좀 달라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일반화할수는 없겠지만, 마냥 경험이 많고 똑똑하다고 해서 국정이 잘 풀리고 정부 혹은 정치권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사라지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곱씹어야 할 지도자의 자질이 제대로 된 사유와 토론의 대상이 되지 않고, 짧은 정치적 공방의 소재로만 활용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사실 중요한 건 RE100의 뜻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고, 내가 왜 국민의 대표가 되고 싶은지를 설득력있고 허심탄회하게 후보들이 밝히는 것이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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