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rdy Jun 12. 2022

부모와 자식 관계


최근 교회 부흥회에 가서 들은 얘기다. 목사님이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재혼했다. 새엄마는 이 목사님을 때리고 학대했다. 걸레통에 있던 걸레를 꺼내 머리를 때리고, 자고 있던 어린애의 머리통을 발로 밟았다. 목사님 속에는 울분이 찼다. 성인이 되고 그게 폭발해서 죽여버리겠다며 새엄마의 방을 열었는데 시장에 가고 없었다. 목사님은 의자를 비롯한 가구를 부수기 시작했다. 고래고래 소리도 질렀다. 수십 년간 참아왔던 그 억울함과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것이다. 


그러던 중에 목사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왜 그 새엄마가 너를 괴롭혔는지 아느냐. 그녀도 상처가 컸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새엄마의 기구한 삶을 반추했다. 제대로 된 부모 밑에서 자라지 못하고, 첫 남편과 사별한 뒤 어렵게 살다가 재혼한 한 여자의 삶이었다. 목사님은 분노를 내려놓고 새엄마를 사랑하기로 했다. 그의 형제들은 나중에 커서 그 여자를 어떻게 해버리겠다고 살기를 뿜었지만 목사님은 달랐다. 이제 새엄마는 목사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한다. 그 목사님은 용서의 힘이 이렇게 소중하다며 자존심과 과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응답을 들으라고 했다.


너무나 감동스러운 이야기였으나, 너무나 공감이 되지 않았다. 왜 항상 종교는 피해자에게 희생과 용서를 강요하는 것일까. 그 새엄마는 자신의 만행을 자식들에게 먼저 사과하지 않았다. 자식들은 그저 자신의 상처를 푸는 도구일 뿐이었다. 그런 사람을 굳이 용서할 필요가 있나. 자신의 잘못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에게 굳이 관용이라는 영광을 베풀 필요가 있느냐. 과분하다. 왜 하나님은 당한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라고 하실까. 왼쪽 뺨을 때리면 왜 오른쪽 빰까지 내밀라고 하실까. 그런 섬김의 리더십을 갖추고 건너편의 사람들을 감화시키라는 뜻이겠지만 그렇게 감화될 사람들이면 애초에 만행을 저지르지도 않는다.


성경을 보면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의 뜻을 우선하라는 구절이 있다. 당최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부모다운 부모가 있다면 부모 같지 않은 부모도 있다. 가스 라이팅으로 자신의 너절하고 얄팍한 생각을 자식으로 하여금 진리로 믿게 하는 부모 같지 않은 부모가 많다. 이런 부모의 말까지 섬기라는 것인가. 난 가끔 보면 성경이 갑 혹은 권력자의 지배 체제를 정당화하거나 확산하는 도구로 사용될까 우려스럽다. 부모를 다룬 구절이 딱 그렇다. 부모답지 않은 부모의 부모답지 않은 주문이나 헛소리에 대해 자식은 분명하게 거부해야 한다. 



세상에는 우리 부모님 같은 좋은 부모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다. 자식을 소유물로 착각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윽박지르며 가스 라이팅 하는 부모의 허울을 쓴 사람들이 참 많다. 자식을 응원하기보단 한심하게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주체적인 의견을 낼라치면 "네가 뭘 아느냐.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그런 부모들의 특징이 있다. 친구가 없다. 친구를 포함해 자신의 의견에 대해 반론을 내거나 토론할 사람이 없다. 딱히 참여하는 모임도 없다. 맨날 남편과 아내가 집에 틀어박혀 자신들끼리 얘기만 하다 보니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시각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다. 기댈 곳이라곤 자식들 뿐인데 자꾸 전화를 잘 안 받고 새로운 걸 시도하려는 자식에게 잔소리를 하면서 자신의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서로를 좀먹는, 고이다 결국엔 썩어가는 소통 방식이다. 


이들은 자식의 이야기를 들을 줄 모른다. 무조건 자기 말이 맞다고 한다. 직장과 커뮤니티에선 제대로 말도 못 하면서 가정에 돌아오면 왕으로 군림한다. 쌍팔년도에야 그런 위계적인 가부장 방식이 자식을 옥죄고 속박했다지만 21세기에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내가 하루에 한 번씩 부모님께 전화하고, 또 부모님을 생각하고 고마워하고 사랑하는 것은 부모님이 나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내 얘기를 들어주고, 지지해주고, 또 조언해주며 나를 인정해주시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님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이 너무 즐겁다. 근데 다른 집은 이런 경우가 많지 않다는 걸 최근에야 깨달았다.


과거엔 내가 주변에 잔소리를 많이 했다. 부모 자식 관계는 칼로 물 베기 라는데 왜 그렇게 부모님께 하냐, 좀 더 친근하게 전화도 하고 다가가라고 다그쳤다. 그건 오만이었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했던 말과 행동을 모른 채 부모와의 관계를 개선하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 후로는 잘 말을 하지 않는다. 어차피 가정의 분위기는 부모가 주도하는 거고, 자식은 따라갈 수밖에 없다. 잘못된 부모가 가정환경을 망치고 대화 없는 가정을 만든다. 


뻔하지만 또 해법도 없는 부모와 자식 사이를 이렇게 길게 적는 것은 최근에 지인이 비슷한 상황을 겪는 걸 바로 옆에서 목도했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부모가 풀 곳이 없어 자식에게 내뱉은 날카로운 말은 그 자식뿐 아니라 그와 이어진 주변 사람, 생판 남의 마음까지 스크래치를 낸다. 말의 칼로 가슴을 후벼 파고, 영혼까지 찢어놓는다. 그래서 글로 쓰면서 마음을 풀고, 상처를 가라앉힌다. 어찌 보면 불쌍한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자신이 잘못한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가정을 꾸릴 수 있다면 절대 저런 부모는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부모의 말이 진리라는 성경 구절은 그냥 한쪽으로 치워놓고. 

매거진의 이전글 해방은 요원하지만 그래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