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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May 16. 2022

해방은 요원하지만 그래도


스포왕창


미친듯이 일이 쏟아져 점심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욕만 실컷 쳐먹은 날. 자괴감을 온 몸에 둘러싸고 밤늦게 집으로 온다. 눈이 찢어질 것 같은데도 넷플릭스를 켜고 영화를 보거나 사놓고 한번도 열지 않았던 책을 읽는다. 맥주까지 마시면서 새벽 1~2시까지 버틴다. 내일 장난아니게 힘들고 피곤할 것을 알면서도 굳이 그렇게 한다. 그냥 하루에 잠깐이라도 내 시간을 갖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주체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몇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비록 그게 소소하고 별거 아닌 것 들이라도 그냥 무언가에 먹혀서 살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모든 일이 다 비슷하겠다만 기자라는 직업도 들인 시간과 노력만큼 보상을 얻는 것 같다. 아무리 똑똑하고 글을 잘 써도 새로운 출입처에 배정받으면 사람을 사귀고 분위기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내가 내 시간을 포기하고 내 삶과 내가 원하는 것들을 희생하며 인생을 일에 갈아넣는다면 적응 기간이 줄어든다. 계속 그렇게 하면 출입처를 장악하고 취재원이나 동료 기자들로부터 '에이스'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뭐? 기자라는 직업과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수많은 뼈기자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면 자연스레 쟤는 일보다 개인생활 챙기는 놈, 열심히 안하는 뺀질이 소리를 듣고 주변인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근데 그것도 어쩌면 행복한 삶일지 모른다.


눈물과 감동으로 나의 아저씨를 영접한 나는 박해영 작가 신작을 꽤나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하고 집에와서 마치 숨겨놨던 과자를 남들 몰래 꺼내먹듯 한편씩 들춰보고 있다. 이번 드라마는 전작인 나의 아저씨에 비해 꽤나 불친절하다. 작가의 생각이 인물들의 입을 타고 그대로 전달되니 좀 어색도 하다. 인물들은 서로에게 말을 하지만 모니터 너머의 나에게도 함께 말하는 것 같다.


난 박해영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어딘가 모자라고 아프고, 겉으로는 떳떳해도 속이 곪아 썩어있어서 좋다. 현실적이다. 그들의 찌질함은 찌질하면서 찌질하지 않은 척하는 우리 절대 다수의 찌질이들에게 너희 진짜 찌질해, 근데 그렇게 찌질하게 살아도 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찌질이끼리 찌질찌질 대면서 찌질한 인생 한번 잘 살아보자 이런 것.


난 그리고 이렇게 아프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가족에게든 연인에게든 친구에게든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에게든 자신의 속내를 얘기하고 드러내는 게 좋았다. 드라마라 가능한 이야기다. 동아리 가입을 강요하는 개같은 회사 분위기, 능력이 없어서 이직도 못하는 주제에 자리 차지하고 앉아 후배 까내리기 바쁜 쓰레기같은 상사와 관심도 없으면서 관심있는 척하면서 오지랖 부리는 사회 세태를 꼬집고 비트는 작중 인물들의 모습이 대견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난 용기가 없어서 제대로 말도 못하는데.

 

   

잔잔한 드라마는 계속 되묻는다. 뭐가 행복이고, 어떻게 사는게 좋은 인생일까.


첫째가 다니는 여론조사 회사 팀장은 바람둥이라고 소문났지만 정작 그는 온갖 소문에도 자신을 믿어주는 그런 사람을 원한다. 첫째가 사랑에 빠진 애 딸린 홀애비의 누나는 그 아이를 위해 자신의 사랑과 인생을 바치겠다고 했다. 근데 그 아이는 정말 그걸 원할까. 혹시 그냥 자신이 스스로 행복할 자신이 없어서 애 핑계를 대는 건 아닐까.


둘째네 편의점 회사에서 온갖 여우짓 얌체짓 다 하면서 사내 신망을 잃고 자존심만 세우는 상사는 과연 행복할까. 눈치 빠른 그녀는 일부러 더 독하게 자기방어 기제를 세우는 것 같다. 누굴 추앙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난 추앙이라는 단어가 아직도 낯설다. 내가 너무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내 모든걸 바쳐서 그를 경배하고 받들고 모든걸 해주고 싶으면 추앙이 맞는 걸까? 그리고 서로 추앙하면 모르는데 한쪽만 추앙하면 그걸 진정한 사랑이라 볼 수 있을까? 다들 찌질하고 힘들고 인생 살기 어려워 죽겠는데 추앙까지 해야돼? 하는 생각도 든다.


어차피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더 사회적인, 더더더더 사회적인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해방'이라는 말 자체가 불가능할지 모른다. 아예 무인도 가서 살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난 이 드라마가 굳이 해방이라는 테제를 들고 나온 이유에 주목하고 싶다.


언제나 더 좋은 남자를 찾던 첫째는 그 기준에서 스스로 해방되어 애 딸린 홀애비지만 참 좋은 남자를 만난다. 둘째는 아직 모르겠고, 셋째도 무기력하고 지겨운 일상에서 해방되어 구씨라는 돌파구를 찾는다. 굳이 연애라고 한정짓기 어려운 것이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인생을 만나 내 인생이 새로운 사람으로 인해 새롭게 되어 간다. 그것도 해방일 수 있을 것이다. 남들과 똑같은 삶, 남들이 부러워 하는 인생, 남들이 신경쓰고 주목할 만한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척 해야 하는 대한민국에서 정신승리가 될 지라도 스스로 해방을 위해 노력하고 뭐라도 해보자, 새로운 인연을 소중히 하며 도전해보자는 메시지를 주려고 한게 아닐까 박해영 작가는. 해방은 어렵고 요원하지만 그래도 노력은 더 해보자는. 난 해방을 꿈꾸며 6시간 후에 국회의사당으로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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