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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Apr 15. 2023

국익이라는 미명


국익이란 국가가 현재 추구하고 있거나 추구해야 하는 중요한 가치로, 국가의 이익을 뜻한다. 나는 11년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국익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주로 뭔가를 취재하거나 보도할 때 공무원이나 취재원이 "국익을 더 생각해 달라"며 보도 유예를 요청하거나 아예 기사를 쓰지 말고, 기보도 됐다면 기사를 내려달라고 할때 쓰는 클리셰다.


그럴때마다 항상 생각했다. 국가의 이익은 과연 누가 정하는가. 대통령이 국가인가? 정권이 국가인가? 여당이 국가인가? 당 대표가 국가인가? 나는 항상 국민 전체가 아닌 특정 세력이나 인물이 국가를 참칭하고, 본인이 나라를 대신해서 국익이라는 이름을 팔아먹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다지 민감한 정보도 아니고, 이게 국가가 아닌 일부 정치세력에게만 불리한 기사인데 항상 국익을 들먹이며 나를 매국노로 몰아갔다. 권력을 가진 집단은 국익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암울했던 독재 유신 시절, 모든 자유를 억압하며 갖다붙였던 그 국익이라는 굴레가 또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런 상황은 이해한다. 해외에서 우리 상선이 해적에게 잡혔는데 협상 단계에서 기사가 나오면 인질들의 목숨이 위험하니 기사를 유예해 달라는 식의 요청 말이다. 국익을 위해 기자들도 모두 이해하고, 수긍한다. 그런데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니고 어딘가 정부에 불리하고, 정부가 잘못했거나 무시당한 외교 사례 등이 있다면 당연히 기사로 작성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 언론에까지 알려질 정도면 정권의 실수나 무능이 어느정도 커졌을 따름인 거고, 지적하면 수긍하고 고치고 바꿔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국익 운운하며 본인들의 치부를 가리려고 한다? 21세기 한국 사회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민 대다수의 공감을 얻지 않는 이상 국익은 더 이상 국익이 아니고, 특정 세력만을 위한 사익으로 변한다. 더 이상 애국심을 강요하는 정치 전략은 먹히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공감이 되어야 한다.


미국 정보기관의 우리나라 국가안보실 도·감청 정황이 담긴 기밀문건이 유출된 것을 두고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다. 대통령실은 "언론의 자유와 국익이 늘 일치하지는 않지만, 만약에 국익과 부딪치는 문제라면 언론은 자국의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옳은 길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본다"고 했다. 언론의 자유보다 국익이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게 불이익이 될 수 있으니 미국의 도·감청 문제를 키우지 말아달라는 뜻이다.


한미 관계의 중요성은 따로 거론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 정부는 불법 도청 의혹이 제기된 가해자 미국을 계속 대놓고 두둔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아무리 미국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더라도, 주권 국가가 도청을 당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다. 한국을 핫바지로 보고, 정상적인 외교루트가 아닌 과거 냉전 시대와 같은 변칙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보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 않은가. 아무리 불법유출이든 뭐든 그런 사실이 공개됐다는 게 중요한 거다.


그렇다면 정권은 고도의 외교력을 발휘해 물밑에선 미국과 어떻게든 해법을 논의하더라도 공개적으로는 미국에 유감을 표하는 식으로 투트랙 전략을 했어야 맞다. 당연히 불법 유출된 경로에 초점을 맞추며, 이런 불법적인 자료가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 정권은 전 정권보다도 외교에 있어 미숙하기 짝이 없어서 아예 사안을 논하지 말자고 한다. 언론 뿐 아니라 국민의 눈을 닫고 귀를 닫고, 태극기를 가리키며 "우리 저쪽만 바라보자"고 한다. 터진 사안을 어떻게든 해결해보려하지 않고, 이데올로기와 정치 논리에만 기댄다. 행동은 안 취하고 국민들에게 정권을 이해해달라고만 한다. 그러니 집권 1년도 안 되어서 20% 지지율에 그치는 것이다.  



난 오랜 시간 청와대와 민주당을 거치며 민주당에 대한 환멸이 커졌다. 그들의 형제 문화가 싫었다. '우리가 남이가' 정신이 싫었다. 자신들과 친하고 좋은 기사를 쓰는 기자하고만 형 동생하고, 지적하는 기사를 쓰면 배척하고 뒤에서 욕하는 철부지 같은 모습이 진절머리가 났다. 자기들만 옳고, 너희들은 틀리다는 오만한 태도가 짜증났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니 똑같은 행태가 반복된다. 외교 뿐 아니라 정책 전반의 영역에서 그렇다. 그렇게 검사 위주의 인사 하지 말라고 하는데 한다. 노동시간 조정은 갑자기 말을 바꾸고, 다른 분야에서도 비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진짜 진짜 걱정된다. 사건 사고도 쏟아진다. 그래서 지적하고, 우려하고, 꼬집으면 갑자기 국익 드립을 치고 나온다. 국익을 위해 입을 닫으라고 한다. 이건 국익이 아니다. 지금은 유신이 아닌 민주주의 시대이니, 윤석열정권은 국가와 동일한 개념이 될 수 없다. 국민을 대신해 들어선 정부이니 응원하고 따라야겠지만 비판까지 안 할 수는 없다.


나는 국익이라는 말이 이렇게 쉽게 오용되는 현실이 더 우려스럽다. 대통령실 뿐 아니라 전 부처에서 국익을 들이미는데, 박근혜정권 때는 최순실이 국익이었다. 문재인정부 때는 운동권 살리기와 북한이 국익이었다. 이명박정부는 대통령이 몸 담았던 대기업 생태계 살리기만 몰두했다. 정권마다 사람마다 들이미는 국가의 이익이 달랐고 참과 거짓이 그때 그때 상이했다. 만약 좌파 정권이 다음에 들어서면 이번엔 미국과 척지는 것이 국익처럼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국익이라는 명제와 워딩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전쟁을 겪지 않은 Z세대 등에게는 더 와닿지 않는 용어일 것이다.  


그러니 국익 타령할 시간에 물밑에서 빨리 해법을 찾아야 한다. 대통령실 고위 관료가 공항에서 특파원 기자들에게 "그런 질문은 하지 말라"고 갑질하고 고개를 들 시간에 더 열심히 바쁘게 뛰면서 상처받은 국민들의 자존심도 세우고, 미국도 만족할 만한 해답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걸 할 생각도 의지도 없으면서 국익을 해치지 말아달라는 워딩 한줄로 사태를 돌파하려 하다니, 국정을 너무 쉽게 풀어 나가려고 한다.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하면, 도청 관련 기사는 미국 뉴욕타임즈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 외국 언론에는 한 마디도 못하고 우리 언론에게만 국익을 지켜 달라하면 무슨 소용인가. 전세계에 뉴스가 퍼지는데 우리만 조용히 하면 의혹이 사라지나. 만약 국내 언론이 첫 보도를 했으면 어떻게 됐으려나. 또 대통령실 출입이 제한 되려나. 적어도 문재인정부에선 이렇게 대놓고 언론을 검열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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