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rdy Jul 24. 2023

학생 vs 선생


난 충남 천안에 있는 북일고등학교를 나왔다. 예전부터 군대식 문화로 유명한 곳이었다. 내가 입학하기 직전까지 교련 수업을 했다. 매주 월요일 조례는 장관이었다. 자로 잰 듯이 열과 오를 맞춰 도열하면 학생주임이 단상에 올라 큰 소리로 정신교육을 시켰다. 유도를 배웠으며, 체벌이 밥먹듯 이뤄졌다. 유도 선생은 막대기로 학생들의 발가락을 수없이 내리쳤다. 둔탁한 그 촉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모범생 축에 속해서 엄청나게 많이 맞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사들이 도구가 아닌 손과 발로 아이들을 때리고 욕설을 내뱉는 장면을 수없이 목도했다. 북일고 특유의 서슬퍼런 분위기에 나는 완전히 압도됐다. 모든 학생이 그랬다.


이런 일이 있었다. 중학교 3년 내내 모범생으로 지냈던 나는 사춘기가 좀 늦게 왔다. 고1때 처음으로 어떤 친구와 싸웠다. 주먹질도 못하면서 자고 있는 애의 뒤통수를 갈겼다. 결국 난 흠씬 두들겨 맞고 코뼈가 부러졌다. 처음에는 몰랐다. 싸움 직후 내 생에 처음으로 근신 비슷한 처분이 내려졌다. 교실 바깥으로 책상을 빼 놓고 앉아 있는 형벌이었다. 몰래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별안간 눈앞에 별이 그려졌다. 지나가던 학생주임이 내 뺨을 때린 거였다. 코피가 줄줄 났고 병원에 가니 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그 덕에 나는 그 유명한 대천임해수련을 가지 않았다. 대천임해수련은 북일고만의 전통으로, 여름철 살인적인 폭염이 쏟아지는 해변에 수백명의 학생들을 세워두고 얼차려를 주는 개같은 행사였다. 다녀오면 모두 피부가 찢어지고 화상을 입고 난리였다. 그래도 아무도 학교에 불만을 감히 말하지 못했다. 그걸 빠질 수 있어서 난 오히려 좋았다.


지금같으면 난리가 났겠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그 억압과 분위기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내 모든 목표였는데, 그러려면 학교 선생님에게 잘 보여야한다고 되뇌었다. 소위 문제아들도 무서운 교사들의 말은 잘 따랐다. 그나마 학교가 인문계 교고라서 그런것도 있을 터다. 아무리 과외를 받고 학원을 간다해도 일단 학교생활에 충실해야 좋은 내신을 받을 수 있었고, 교사의 말 한마디는 그래서 중요했다. 새벽부터 이어지는 0교시와 밤 늦게까지 계속되는 보충수업 탓에 우리 학생들의 정신이 혼미했을 수도 있다. 선생에게 대들고 거역하는 것은 한번도 생각해본적도 없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우리 부모님이 선생님이었던 이유도 있었던 것 같고.


다만 나는 그때가 마냥 좋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학교에 가기 싫었다. 어느정도 익숙해졌다 싶다가도 그 특유의 숨막히는 분위기, 눈치보고 혼날까봐 두려워하는 그 상황이 거북했다.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았다. 학창시절의 기억이 좋지 않다. 그냥 맨날 피곤하고 지치고 일부 몰지각한 교사가 누군가를 어이없이 혼내는 장면을 보면서 진저리를 쳤다. 지금은 북일고가 자율형사립고로 바뀌었는데, 당시만 해도 실력 미달의 선생도 많았다. 사립고라 더 그랬을 거다. 특히 본교 출신 젊은 선생들 가운데 수업을 못하는 이가 많았다. 



아직 조사중이지만 학부모의 성화에 시달렸던 선생님이 학교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고, 학생이 교사를 수차례 폭행하는 일이 횡행하는 요새 교육현장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그 시절, 그 풍경이 과연 답일까. 


여권은 이번 사태의 책임을 학생인권조례와 체벌 금지 등으로 돌리고 있다. 학생인권조례가 학생과 학부모로 하여금 교사를 무시하도록 부추겼다는 것이다. 교실에서 교사가 학생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규정을 정해 체벌을 하거나 불이익을 주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또 흘러나온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렇게 높아만 보였던 선생님이 이제는 한없이 작아보이는 시대가 됐다. 그림자도 못 밟더니 이제는 숫제 선생이 학생의 그림자를 피해다닌다는 우스개소리도 나온다. 떨어진 교권, 당연히 올려야 한다.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하는 선생님에게 스승으로서의 권리를 다시 찾아줘야 한다. 그런데 그 전에 불과 수십년만에 왜 이렇게까지 학교 현장이 타락했는지 나름의 관점에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원인을 따져봐야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을 것 아닌가.


사실 권위적인 학교 분위기의 해체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일단 사교육 시장의 팽창으로 공교육이 힘을 잃었다. 예전에도 사교육은 있었으나 지금처럼 대단한 힘을 발휘하진 않았다. 입학사정관제 등의 새로운 교육제도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학교 수업은 뒷전으로 밀렸다. 경쟁이 붙으면서 상당히 많은 학생들이 사교육을 받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우수한 강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학교 교사들은 실력에서 밀릴 수 밖에 없게 됐다. 내신과 생활지도부라는 마지막 보루가 있지만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느새 명문대 진학이 처음이자 마지막 목표가 된 학창시절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를 무시하게 된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 됐다. 인터넷과 유튜브의 발달도 여기에 불을 지폈다. 학원과 과외, 유튜브와 인강을 통해 필요한 학습을 할수 있으니 학교는 그저 모두가 다니니까 어쩔수 없이 가는 그런 곳으로 전락해버렸다. 별로 중요치 않으니 학생과 학부모는 더 기고만장해진다. 학생이 오만방자한 행동을 하면 교사가 일단 제지하고, 학부모가 와서 깽판치고 교감 교장 학교는 교사를 나무라고 이런 행태가 불과 몇년안에 고착화되면서 교권은 점차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다. 


우리네 교육현장이 이렇게 되었는데 체벌을 부활시키고, 일부 지역의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면 사태가 해결될까. 절대 아니다. 임시방편은 되겠다만 만능열쇠가 될 순 없다. 어차피 공교육이 사교육을 따라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래도 공교육이 학생과 학부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교육 체계를 개편하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에서 참 어려운 문제겠다만, 그래도 학교를 감히 무시할 수 없도록 하는 유인책을 만들어야 한다. 벌점 제도를 더 강화해서 입시 반영 비중을 늘린다든지 해야 한다. 그래야 학부모가 교사 개인 번호를 알아내서 본인 아들, 자기 딸 관련 민원을 하고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 식의 덜떨어진 행태 등을 없앨 수 있다. 일부 맘충들의 정신나간 짓거리도 멈출 수 있다. 


교육 체계 전반을 바꾸기 위한 치밀한 고민없이 무작정 뭐만 없애자, 뭐만 만들자 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그러니 여당과 일부 보수 언론의 지적질에 잘 공감이 되지 않는다. 작금의 사태는 학생과 교사를 나누고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친구에게 물었다. 그는 학생들을 때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자신도 학창시절 선생님에게 많이 맞았고, 때로는 복수하고 싶을만큼 미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교사로 임용되면서 하나 다짐했다. 마음과 사랑을 다해 좋은 인재로 키우겠다는 거다.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그들과 함께 소통하면서 아이들이 오고싶은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친구도 요새는 많이 힘들어 한다. 아이들을 어떻게 통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눈치가 보인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선생으로서 학생과 학부모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했다. 함께 해야할 동지이자 식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친구와 같은 훌륭한 선생님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한다. 또 선생을 때리는, 소년원에 잡아 쳐넣어야할 정신나간 학생들도 있지만 여전히 착하고 좋은 학생들도 많다. 본인의 바닥 인생을 선생에게 푸는 못배운 학부모나 일부 맘충이 있다면 내 자식만 소중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식을 올바로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좋은 학부모도 있다. 


나는 교육전문가가 아니라서 학교 현장을 개조하고, 교권을 살리며 모두가 행복한 학교를 만들 정확한 해법과 방법은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찾아야할 것은 이런 바람직한 학교 구성원들이 더 목소리를 내고, 함께 화합할 수 있는 그런 +(플러스) 적인 대책이다. 학생과 선생을 나누고, 이간질하고, 광분하는 이들을 차분히 바라보자. -(마이너스) 얘기만 하는 사람들이다. 교육의 교자도 모르는 무식한 정치인들이 대부분이다. 정작 학교 사람들은 울면서, 온 가슴을 열고 화합을 외치는데 그들은 갈등과 분열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안타깝게 우리곁을 떠난 20대 초반의 선생님은 과연 어떤 답을 원했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무겁고, 또 무겁게 생각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의 슬픔에 공감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