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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Nov 09. 2019

영알못의 삶


난 영어를 못 한다. 딱히 부끄럽진 않다. 수능 외국어 영역은 1개 틀렸고, 토익도 어떻게든 900점을 넘겼다. 어느 정도는 되는 줄 알았는데, 잘 하는 또래가 너무 많다. 동기들만 봐도 그렇다. 외고 출신도 있고, 4개 국어를 하는 신기한 인종도 있다. 나는 평범하다. 그래서 영어를 못 한다. 너무나 평범해서 영어를 못 한다. 내가 정상이다. 그들이 이상한 거다.


최근 아부지한테 전화가 왔다. 하이톤으로 ‘어 아들’ 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수화기를 타고 약한(맥주 몇잔에도 취하는 분이라 ‘약한’이라는 표현이 맞다) 술 냄새가 풍겨왔다. 아부지는 대뜸 ‘미안하다’고 했다. 어학연수를 못 보내 준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재수하느라 쓴 돈 몇 천, 대학 등록금, 매주 받았던 생활비, 치아교정비, 싸우다가 나간 코뼈 치료 값, 초등학교 4학년때 나만 부레옥잠을 못 가져가게 생겼다고 우는 통에 새벽 3시에 아산까지 가서 사오신 부레옥잠 값 등 형이하학적 요소만 따져 봐도 평생을 갚아도 안될 은혜를 받았건만 아직도 아부지한테는 남들보다 못해준 것들이 한으로 남아있었다.


왜일까 생각했다. 사건팀 시절 구글 회장 에릭 슈미트가 서울대에 왔는데 우연히 총맞고 취재를 나간 내가 1시간 동안 무슨 말인지 몰라 남들이 웃을 때 웃고 박수칠 때 박수쳤다는 얘기를 이번 명절에 웃자고 했던 기억이 났다. 고마운 연합 선배 덕에 기사는 잘 막았고, 이 얘기는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도 간혹 먹혔던 레파토리였다. 그런데도 부모의 마음에는 그게 미안함으로 남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보훈처 담당 취재를 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귀국한 625 참전용사를 인터뷰해야 했는데 보훈처 공무원이 물었다. "통역 필요 없으시지요"라고. 에릭슈미트의 악몽이 떠올라 "무조건 필요하다"고 했다. 그 공무원이 되물었다. "요새 젊은 기자님들은 다 영어 잘 하시던데요.." 국제부 소속이 아닌 이상 영어 쓸일이 잘 없다고 생각했는데 청와대 오니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의 '돌발 영어'가 문제다. 영어를 잘 하면 외신과의 접촉도 수월하고 보다 기회가 많을텐데 확실히 좀 아쉬운 측면이 있다.


사실 내 책임이 더 크다. 그깟 어학연수 몇 년 다녀온다고 영어를 잘 하겠나. 내가 관심가지고 공부하고 시간쪼개 학원가고 하는 게 맞는데. 우리 아부지 같은 마음을 가진 학부모들이 많을거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만든거다. 과거, 자식이 대학을 가고 취업하고 결혼에 성공하면 멈췄던 부모의 도리라는 것은 이제 할미육아로까지 번졌다. 평생을 자식에게 퍼주며 살고 남과 비교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부모의 삶은 얼마나 눈물겨운가. 예전에 우리 집보다 잘 사는 친구들을 부모님께 간혹 언급했던 내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럽고 죄송해 잠을 잘 못잤다. 내려놓기가 참 어렵다.


속보 써야 되는데 쓰기 싫어서 이런 글이나 적고 있다. 솔직히 아무도 안볼 속보가 뭐 그리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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