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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Oct 19. 2019

예술의 수준


수십년 전 독일의 한 TV 프로그램이 ‘몰카’를 준비했다. 두 마리 침팬지에게 붓을 쥐어주고 캔버스를 마구 칠했다. 해당 그림을 ‘제 3 세계에서 온 젊은 미개인전’이라는 가짜 전시회에 출품했다. 당시 함부르크시립미술관장은 작품에 대해 “젊음의 신선함과 패기,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작가는 네 가지 색만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완벽하다”고 극찬했다. 이름난 미술관의 관장과 예술 비평가들도 줄줄이 ‘작가의 창의력에 경의를 표한다’고 응수했다. 참으로 꿈보다 해몽이다. 아무렇게나 흩뿌려 놓은 물감의 향연이나 무심코 쌓아놓은 깡통들을 두고 ‘누가 장난쳤어’ 싶다가도 잭슨 폴록이나 앤디 워홀의 작품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현대 사회를 사는 인간들의 외로움을 표현했군. 정말 멋지다!’ 하는 것이다. 쉽고 편하고, 일상적인 게 아니고 한번 뒤틀고, 난해하게, 이해가 어렵도록, 사실 아무것도 내포하지 않았음에도 해석의 여지를 무궁무진하게 남겨놓으면 좋은 예술 작품이 되는 거라면 이거야말로 허세가 낳은 희대의 사기극 아닐까.


초등학교 백일장 때 비슷한 경험을 했다. 우리 학교에선 매년 의미 없는 글짓기 대회를 무의미할 정도로 자주 열었고, 전교생의 60% 정도가 의미가 증발한 입선부터 대상까지를 나눠먹기 했다. 난 스스로 수상 비법을 터득했는데, 내가 뭘 쓰는지 모를 정도로 아무렇게나 써 발기면 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노을’이 시어로 제시된 적이 있었는데 나는 백과사전을 찾아가며 별 희한한 꽃 이름과 순우리말 색깔명을 다 찾았다. 제목을 ‘꽃 잔치’로 달고 ‘치자빛, 꼭두서니빛, 쪽빛, 숯빛, 찔레빛, 감빛, 먹머루빛 꽃들이 하늘에 피었다. 마치 꽃잔치 같았다’고 마무리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난 학교에서 대상을 탔고, 동일한 시가 지역 경연대회에 올라가 초등부분 은상을 받았으며, 학교 국어교사는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촌평했다. 웃긴 일이었다.


사실 나는 입선을 한 다른 반 친구의 시가 훨씬 더 좋았다. 가족과 함께 주말마다 독거노인 봉사 활동을 다니는데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엔 어스름한 노을이 진다. 학교에서 친구랑 싸우고, 욕 하고, 엄마아빠의 마음을 상하게 했지만 봉사를 다녀오는 길에는 노을처럼 따뜻한 마음을 한껏 안아 기분이 좋다는 평범한 내용을 담담하게 쓴 시였다. 진심이 담긴 시는 저평가되고, 입상을 위한 허세로운 시는 긍정적으로 회자되는 미명스러운 예술이 체감되는 순간이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부착된 시 논란도 어찌보면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미성년자도 이용하는 교통수단이니 ‘브라자’ 운운하는 시는 표현의 자유로만 해석될 수 없다는 주장은 일견 맞다. 다만 ‘시를 읽을 사람은 공짜로 읽을 생각 하지 말고 시집을 사서 읽어라’는 황현산 시인이나 ‘지하철 시를 보고 사람들이 이런 걸 시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생각한다. 더 까놓고 말하면 머리 뜯으며 생각 정리하고, 엉덩이 종기 나게 쓴 시가 모욕당하는 것 같다’고 남긴 김상혁 시인의 일갈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일상 혹은 삶에서 느낀 바를 섬세한 감성의 그물망으로 끌어올린 뒤 정제된 언어로 풀어내려 노력하는 시인들의 노고는 인정하지만 시를 넘어 문학의 수준을 굳이 나누고, 필부의 접근을 막으려는 밥그릇 지키기의 냄새가 노골적으로 피어나서 그렇다. 얼마 전 참석했던 독서 모임에서 한 문학 평론가가 하상욱 시인을 두고 ‘시의 존엄성을 짓밟고 있다’고 표현한 게 문득 떠오른다. 시를 안읽고, 책을 멀리한다며 대중의 지적수준을 폄하하고 만시를 지탄할게 아니고, 본인들의 그 문학적 엘리트주의가 결국은 스스로를 배곯게 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거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읽어도 읽어도 도통 뭔 말인지 모르겠는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깐깐한 시어보다 범인들의 소소한 운율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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