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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Nov 10. 2019

빨간머리 앤


몽고메리의 역작 '빨간머리 앤'은 어린이 전용 작품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아까운 소설이다. 원작을 찾아 읽어보면 앤을 주근깨 투성이의 말괄량이로만 묘사하기 어렵다.


앤은 고아다. 교사였던 부모는 열병으로 사망한다. 이후 여기저기 남의 집을 전전하며 구박을 받다가 남매인 마릴라와 매튜가 사는 '초록지붕 집'으로 입양된다. 예순 가까이 먹은 매튜는 여성을 두려워하는 독신남이고, 마릴라도 평생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노처녀다. 농장일을 도울 남자 고아를 입양하려던 이들은 중개인의 실수로 앤을 소개받고, 다시 돌려보내려다 총명하고 수다스러운 여자 아이에게 흥미와 사랑을 느껴 함께 살기로 한다. '빨간머리 앤'은 그래서 한 여자아이의 성장기로만 보기 어렵다. 어딘가 부족한 이들(노총각과 노처녀가 부족하다는 게 아니고 극중에선 매튜와 마릴라도 어딘가 모르게 외롭고 아파하는 것으로 묘사된다)이 우연한 기회에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묶이고, 서로가 상처를 치유받고 함께 살아간다는 공동체의 회복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앤이 입양된 '에이번리'는 교회와 기독교가 힘을 발휘했던 1900년대 초반 캐나다를 닮았다. 목사와 학교 선생이 마을의 여론을 주도했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횡행했다. 아이들은 자기 전에 기도를 해야 했고, 여성은 정숙한 요조숙녀가 돼야 했다. 매사에 질문이 많던 앤은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목사에 대한 험담을 늘어놨는데, 마릴라는 겉으로는 앤을 혼내면서도 통쾌해한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가 떠오를 만큼 순수한 앤의 눈에 비친 마을의 부조리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여자가 그만큼 배웠으면 되었다'는 레이첼 린드 아주머니의 말이 보여주듯 남녀 차별이 가시화된 분위기에서도 앤은 스스로 공부해 목표한 바를 이룬다. 어찌보면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자, 저자인 몽고메리의 바람이 담긴 소설이기도 하다.


앤은 지독한 컴플렉스 덩어리다. 외모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다. 빨간 머리와 주근깨, 깡마른 몸을 지독히 혐오했던 그는 매일 매끈한 살결과 포동포동한 체격을 가진 채 실크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매번 상상한다. 다만 레드먼드 대학시절까지 그는 원하던 외모를 갖진 못한다. 아름다운 외양대신 슬기롭고 지혜로운 성숙한 여성이 된다. 외모 이야기가 극의 전반을 걸쳐 자주 등장하지만 역설적으로는 외모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 신선하다.


다이애나와의 우정, 길버트와의 사랑 등 일상 속 관계를 짚는 대목도 볼 거리다. 내가 주목한 건 또래와의 관계보다 솔직함으로 무장한 앤의 사람사귀는 방식이다. 레이첼 린드 부인과의 첫만남은 강렬하다. "외모때문에 앤을 입양한 것 같지는 않네요"라는 한마디에 컴플렉스의 화신 앤은 발끈한다. "아줌마는 참 뚱뚱하네요"라고 소리를 지른다.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팩폭을 내지르는 건 에이번리의 보수적 분위기에선 금기다. 사고를 벌인 이후 린드 부인을 찾아간 앤의 사과가 인상적이다. "저는 고아에 불쌍한 아이라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어요. 이런 불쌍한 저를 용서해주시겠어요?" 여우같고 영리한 사과에 곰같은 린드 부인은 마음을 연다. 신은 그에게 아름다운 외모 대신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타고난 매력을 줬다. 앤의 진가는 이렇듯 사람과 부딪치며 서서히 드러난다.


앤의 일생은 4개의 큰 사건으로 나눠진다. 입양 후 매튜가 사망하기까지-에어번리에서 교사로 지내던 시절-레드먼드 대학시절과 길버트와의 결혼,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길버트가 의사로서 전쟁에 나가는 부분까지다. 말많고 꿈많고 상상으로 하루를 보내던 귀여운 소녀가 총명한 여인으로 자라 6명의 자식을 둔 지혜로운 엄마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어찌보면 우리가 커가는 삶과 비슷하다. 그래서 빨간 머리 앤은 아이들만의 전유물이 될 수가 없다.


원본에서 눈에 가는 대목은 자연을 표현하는 부분이다. 아름다운 에이번리의 풍경을 눈앞에 보일 듯 묘사하는 부분은 넘길때마다 절창이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밤중에도 한낮처럼 환하게 핀 메밀밭을 그려낸 대목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탐스럽게 자라난 나무 사이에서 다이애나와 뛰노는 앤의 모습이 책 곳곳에서 그려졌다. 저런 시원한 풍경에서 자란 티없는 아이들은 참 행복하게 지낼수 있겠구나.. 싶다.

고전은 그대로되, 변주 방식은 세월이 흐를수록 확대 재생산된다. 



넷플릭스에서 최근 드라마 '빨간머리 앤'을 방영하고 있다. 일본 애니와 캐나다 드라마에 이은 세번째 재현이다. 애니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앤의 비주얼은 놀랍다. 다만 원작에서 묘사된 외모와는 더 흡사하다는 평이다. 몽고메리는 이 소녀를 통해 과연 어떤 인간상을 이야기하고 싶던 걸까. 말많고 호기심많던 고아 소녀의 생은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줄까.


덧. 세월이 흘러도 남는 건 불꽃같은 고전. 돈도 명예도 직위도 바람과 함께 시간에 흩날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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