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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Nov 10. 2019

수레바퀴와 송유근


지방 부모님 댁에 다녀왔다. 소일거리를 찾다가 책장에 놓인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를 다시 찾아 읽었다. 한스 기벤라트와 처음 만난 초딩시절, 방학 때도 쉬지 못하고 학원에 도장을 찍는 내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는 하일러와 한스의 우정이, 대학생이 되자 한스가 죽고 나서 아버지는 어떻게 살았을까에 더 관심이 갔다. 남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평생 공부하고, 노력하다 결국에 허탈함을 느끼고 좌절하는 그의 모습이 우리 한국 학생들이 감내하며 사는 삶과 흡사해 참 서러웠다.


만년 우울증에 빠져있던 재수 시절이 아스라히 떠오른다. 난 고3 첫해 입시에 실패했다. 언어 영역을 죽쒔고, 가군과 나군에 지원한 학교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좀더 좋은 학교에 가고 싶어 재수를 결심했다. 요즘에야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이라지만 '불합격'이라는 빨간 글씨가 선명한 모니터 앞에서 눈물짓던 나는 그래도 힘겹게 결정했다. 친구들이 OT를 간다, 미팅을 한다고 요란을 떠는 2005년 2월 나는 청솔학원 경기도 광주 캠퍼스로 떠났다.


한스 기벤라트가 주 시험에서 2등을 해서 입학한 신학교처럼, 기숙학원은 산골짜기에 꽁꽁 숨어 있었다. 부모들의 눈빛이 기대와 기쁨으로 반짝였던 신학교와 달리 기숙학원 입학식 분위기는 침울했다. 학생 100여명이 고개를 푹 숙인 뒤로 부모와 형제가 자리했다. 학원 원장이 앞에서 소리치면 모두가 제창했다. "우리에게 2번의 실패는 없다!" "없다!"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 "있다!" "명문대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있다!" 일부 원생은 살짝 눈물을 보였다. 나처럼 의지를 다잡기 위해 첩첩산중으로 기어들어온 이도 있겠지만, 부모의 강요로 어쩔수 없이 이곳을 찾은 사람도 있을 터였다.


기숙학원의 룰은 엄격했다. 입시에 실패한 젊은 청춘에게 가혹하리만큼 엄격했다. 우선 주황색과 회색이 결합한 유니폼을 지급받았다. 주황색은 눈이 따가울만큼 밝은 컬러였는데, 원생들 사이에선 탈옥자들을 금방 찾기 위해서라는 우스갯소리도 돌았다. 실제로 학원을 벗어나 도주하는 이가 한두명쯤은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점호가 이뤄졌고, 기합과 벌점 제도가 있었다. 수십여개의 카메라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오전 6시에 일어나서 자습과 수업, 자습과 수업이 이어졌다. 남학생과 여학생은 대화가 불가능했다.


신학교의 '에밀 루치우스'처럼 나는 철저히 외톨이였다. 처음부터 나는 말을 줄이기로 했다. '내 잘못으로 대학을 못갔으니 누구랑 떠들새 없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죄책감이 컸다. 수십만원씩 내야하는 학원비와 오르지 않는 모의고사 점수 탓에 매일밤 가슴이 막혔다. 벙어리처럼 하루에 한마디도 안하는 날도 있었다. 극한과 수열의 끊임없는 수학이 책을 떠나 눈을 거쳐 뇌를 뱅글뱅글 돌아가는 가운데도 또다른 상상의 나래가 계속됐다. 난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감옥에서 언제쯤 나갈 수 있을까, 이렇게 해서 대학에 가면 과연 난 행복할까...


원생들은 참 다양했다. 나처럼 갓 20살 된 학생도 있었고, 회사에 다니다 뜻을 두고 다시 공부하기 위해 찾아온 30대 만학도도 있었다. 난 그곳에서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여자애도 만났다. 우리는 서로 "너 초등학교때는 공부 꽤 잘하지 않았니"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2달여가 지난 뒤 첫 면회의 시간이 왔다. 학원을 나오자 아버지가 멀리에서 손을 흔들었다. 차로 20분을 달려 도착한 고깃집에서 아버지는 돼지 갈비를 사주셨다. 갈비가 나오고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었다. 아버지가 고기를 집어 내 공깃밥 위에 올려줬다. 한입 씹자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는 순간 나는 눈물을 흘렸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 테이블 위로 뚝뚝 떨어졌다. 나를 보더니 옆자리에 앉아있던 다른 여자 원생도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 나 여기 못 있겠어요. 외로워서 도저히 못 있겠어요" 했다. 그렇게 난 기숙학원에서 낙오해 서울 강남으로 올라와 수험 생활을 계속했고, 대학에 합격했다. 그렇게 어느덧 11년이 흘렀다.


난 공부가 즐겁지 않았다. 훈구와 사림의 차이를 외우고, 구개음화를 적고, 별표를 치고, 빨간줄과 형광펜을 직직 그어대면서 단 한번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남들 다하니까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어서 했다. 돌아보면 그때 공부했던 방대한 내용의 10%도 다 기억하지 못하고, 1%도 써먹지 못하고 있다. 세상은 책상에 앉아서 공부했던 이론보다는 훨씬 더 넓고 새롭고 방대한 곳이었다.


한스도 마찬가지 였을거다. 그가 좋아하는 낚시와 수영을 하기 위해, 목사와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공부했지만 '왜 해야 할까'하는 의문이 없었다. 남들의 욕망 안에 묶어둔 공부와 학습은 결국 주체적이고 싶은 한 인간의 삶을 파괴했다. 공부가 수단이라면 이 고통스러운 시간의 끝에는 행복을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한스와 가장 비슷한 한국인하면 '송유근' 군이 떠오른다. 인간극장서 그를 처음봤을 때 경탄한 대목은 그의 천재성이 아니라 무모하리만치 자식에게 올인하는 부모의 모습이었다. 직업을 묻자 '송유근 아빠'라고 대답하고, 식단까지 철저히 계획해 제공하는 장면은 좀 심하다 싶었다. 승승장구하던 송군은 표절 논란이후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는 과연 본인이 즐거워서 공부한걸까.. 다음번 뉴스에 나올때는 활짝 웃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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