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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Dec 18. 2019

대통령과 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진 중에는 막걸리를 농민들에게 직접 따라주는 사진들이 많다. 정장 바지를 겹겹이 접어 무릎까지 올리고, 선글라스를 낀 채 논바닥에서 양은 주전자를 기울이는 모습들이다. 실제로 그는 자주 농촌을 방문해 막걸리판을 벌이곤 했다. 농민들의 애환을 듣는 동시에 자신의 독재자적 이미지를 완화하는 효과도 있었을 게다.     


박정희는 원래 막걸리를 좋아했다. 홀어머니 밑에서 찢어지는 가난을 감내하며 살던 그가 그토록 단신인 것도, 어릴 때 먹지 못한 이유가 크다고 한다. 굶주림 속에서 시장통을 드나들던 소년 박정희에게 이따금 상인들이 건네던 막걸리는 술이라기 보단 허기를 해소하는 끼니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막걸리는 그에게 가난의 아픔이자 위로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박정희가 국정을 운영하면서도 농민들과의 막걸리 한 잔을 찾았던 것은 한 개인의 향수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막걸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유신 체제가 창궐하고 권력의 품으로 더 깊숙이 빠져들면서 그의 술은 ‘시바스 리갈’로 바뀌었다. 지금이야 워낙 다양한 양주가 시중에 유통되지만 당시 시바스 리갈은 대표적인 고급 위스키였다. 풍만한 볼륨감의 병 모양과 자수처럼 세밀한 금빛 문양의 라벨, 잔에 담겨서 내뿜는 구리빛의 액체는 박정희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혹자들은 육영수 여사가 죽고 난 뒤, 박정희가 그 고통을 달래기 위해 막걸리 보다 강한 술인 위스키를 찾았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가 북악산 자락의 요정에서 곱게 차린 여대생을 옆에 앉힌 채 시바스리갈을 들이키는 동안, 그 자신의 고통은 무감해졌을지언정 국민들의 고통은 커져갔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권총 방아쇠를 당겼을 그 날도 박정희의 잔에는 시바스리갈 12년산이 담겨 있었다. 취해서였을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피를 흘리면서도 “음, 난 괜찮아”였다.     



그렇게 박정희가 취중 서거한지 40년이 흘렀다. 여전히 그는 현재에 남아 논쟁거리를 쥐어주고 있다. 어떤 이는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자 서민들을 보듬던 막걸리형 인간으로 추억한다. 또 다른 이는 폭정과 독재의 소용돌이 속에 그저 자기정당화에 급급했던 시바스리갈의 제왕으로 볼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무언가에 잔뜩 취한 듯 경제발전에 몰입했던 박정희 시대를 빼놓고 한국사회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도 각자의 스타일대로 술을 즐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따뜻한 정종을 즐겼다고 한다. 주량이 센 편은 아니었다. 맥주 두잔 정도를 마신 것으로 전해진다. 김영삼 대통령은 위스키를 좋아했지만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에는 주로 포도주를 마셨다. 포도주 반병 정도가 주량이었지만 임기 말년에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포도주 한 병을 마신적도 심심찮게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술을 멀리했다. 주량은 소주나 포도주 두 잔 정도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소주를 즐겼다. 청와대에 입성한 뒤에도 주로 소주를 마시고, 가끔은 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마셨다. 이명박 대통령은 현대건설 사장당시 말술로 유명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술을 끊다시피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주량은 소주 4잔, 폭탄주 1잔 정도였지만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주량은 소주 폭탄주 서너잔 정도다. 그는 막걸리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남 양산에 있을 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던 김해 봉하마을에서 생산하는 ‘봉하 쌀막걸리’를 박스째 사다놓고 매일 한 병씩 즐겼다고 한다. 


물리적인 주량과 별개로,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취하면 안 되는 자리다. 굳이 술이 아니더라도 여론과 소통없이 승리감에 또 도취감에 취해있으면 그대로 사고가 난다. 박정희에 취했던 사람들 일부는 국정농단을 겪으면서도 깨지 못한다. 현 정권도 마찬가지다. 우리편의 따뜻한 말에 취할 일이 아니다. 야당과 비판세력에 좀더 귀를 기울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커지는 건 그만큼 애정이 있다는 말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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