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석과 자유부인
실제로 그랬다. 초등학교 때만해도 여성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면 노인이나 아재들이 다가가서 "어딜 감히 여자가 담배를 피워?"라고 소리쳤다.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와 드라마가 드물었고, 소설과 노래에서도 떠나간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소극적인 여성상이 주를 이뤘다. 학창시절엔 여자들을 향해 "좋은 남편 만나서 살림살이를 잘 하는 것이 좋다"고 가르치는 선생도 많았다.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 여성이 나오면 "아무리 일을 잘해도 여자를 어떻게 믿느냐"며 거르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황당한 유교중심사상이 숱한 침략과 전쟁을 거치며 고착화 됐다. 병자호란 때 오랑캐에게 끌려갔던 여인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는 뜻의 환향녀(還鄕女)라고 부르던 데서 유래한 '화냥년'이라는 용어가 아직도 회자된다. 적지에서 고생한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주진 못할망정 그들이 오랑캐들의 성(性) 노리개 노릇을 하다 왔다고 손가락질을 한 사람같지 않은 이들이 군신유의, 붕우유신, 삼강오륜을 외쳤다. 위기때는 가라고 떠밀어놓고선 상황이 나아지니 입을 씻었다. 인간이 아니다.
헝그리정신에 기반한 산업화 시대는 중공업의 시대였다. 남자들이 좌지우지하는 사회에서 여성은 그렇게 타자화된 채 지내야 했다. 암울한 때였다.
많은 것이 변했다. 우리 대학 흡연실엔 여자가 많았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페미니즘 소설과 드라마, 노래와 영화가 넘치고 자위기구 등 여성의 성에 대한 물품이 각광을 받고 팔린다. 비록 유리천장은 건재하고, 성범죄와 성희롱이 끊이지 않은 미친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해서는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고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 하여 다행스럽다. 대학 입시 뿐 아니라 회사 입사 과정에서도 여성들은 발군의 성적을 보인다.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면 최종면접 후보가 여자뿐이라는 우스개소리도 나온다. 예전엔 여성이 국어, 영어 등 어학에 강하고 남성이 수학, 과학 등 이성적인 학문에 더 뛰어나다는 촌평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 여성이 다 잘한다. 여성임원의 숫자는 여전히 적지만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여성 대통령도 나왔는데... 그분 얘기는 말을 아껴야 겠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말 반성해야 한다. 본인의 넋나간 행동이 한국 민주주의뿐 아니라 당신을 롤모델로 하며 노력해 온 수많은 여성들을 기만하는 행위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통감해야 한다.
우리네 여성들은 말도 안되는 억압과 무시를 상쇄하기 위해 칼날같은 저항에 맞서야 했다. 가수 윤복희가 처음으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TV에 나왔을 때 모두가 '풍기가 문란'하다며 손가락질 했다. 남성들은 겉으로는 욕을 하면서 뒤로는 윤복희 사진을 구하려 혈안이 됐다고 한다. 남성이 바람을 피워 갑자기 정체불명의 애를 데려오면 말없이 키워야 했다. 만약 반대의 경우가 벌어졌다면 욕먹고 쫓겨났을 것이다. 야만적인 세상의 인식을 바꾸려면 욕을 먹더라도 여성이 주체화된 컨텐츠가 필요했다. 남성에게 억압받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행동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컨텐츠 말이다.
소설가 정비석의 '자유부인'은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주체적인 신여성의 캐릭터를 처음으로 도입한 소설이라 볼 수 있겠다. 이 소설은 1954년 1월1일부터 8월6일까지 215회 동안 서울신문에 연재됐다. 70회 정도를 넘어가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서울신문사도, 정비석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기였다.
줄거리는 이렇다. 대학교수의 부인인 오선영 여사가 대학생과 춤바람이 난다. 여러 탈선행각을 저지르다가 결국은 남편의 용서로 다시 집에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결말이 좀 빻았지만, 신사임당 같은 부인상을 강요해온 당시 분위기에선 파격 그 자체였다.
여기에는 당시 변화하던 시대상도 한 몫했다. 1954년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전후 여성들은 조금씩 변화했다. 전선에 나간 남편 대신 혼자 생계를 이끌며 자식들을 먹여살려야 했다. 직접 직업을 구했고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남성을 울타리를 벗어나 춤과같은 취미가 유행했다. 자유부인의 주인공 오선영 여사도 스스로 양품점을 경영하면서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탈피하게 된다.
반발은 당연했다. 남성 독자들, 특히 나이 지긋한 어르신과 사회 지도층이 비윤리적인 연재를 그만두라고 항의했다. 남편 직업이 대학교수라는 점을 들어 교수사회에서도 비판이 쇄도했다.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법학자 황산덕 박사는 공개적으로 자유부인을 비판했다. 그는 서울대에서 발행하는 대학신문 1954년 3월 1일자 ‘자유부인 작가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글에서 ‘갖은 재롱을 부려가며 대학교수를 모욕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고를 했다. 작가 정비석은 3월 11일 서울신문에 ‘교수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흥분한다’고며 반박글을 썼다.
황 교수는 다시 ‘문화의 적, 문학 파괴자, 중공군 50만명에 해당하는 적’이라며 자유부인을 혹평했다. 당시 북한에서 자유부인을 근거로 ‘남한은 지금 이렇게 속속들이 썩어가고 있다’는 선전공세를 핀 것에 대한 항의였다. 그만큼 정말 화제이긴 한 모양이다. 남성들은 정부에도 투서를 보냈고 정비석은 치안국, 특무부대 등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헤프닝도 벌어졌다.
2020년 현재에서 바라본 자유부인 논쟁은 '해묵음' 그 자체다. 비혼, 졸혼, 이혼이 폭증하는 지금 여성의 사랑은 감춰야 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 됐다(물론 불륜이나 바람은 안 되겠지만). 다만 '82년생 김지영'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아직도 여성의 인권이 남성에 비해 경시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은 것은 아픈 부분이다.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여성을 억압하는 풍조가 이어지고 있다는 거다. 한남과 김치녀, 일베와 메갈 사이에서 여성테제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위태롭게 도마에 오르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존재다. 법을 위반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이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기본적인 도덕과 제도, 법규를 지킨다면 눈치보지 않고 살 수 있다. 자유부인이라는 말 자체도 정숙함 또는 원숙함, 교양을 갖춘 듯한 뉘앙스가 담긴 부인과 자유를 배치하면서 반전효과를 노린 용어로 보인다. 부인이든 남편이든 성별을 넘어 모두가 사람이고 인간이다. 애꿎은 관습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결혼 생활에 최선을 다하되 폭력 등이 벌어지면 헤어질 수 있다. 이혼한 사람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고, 결혼을 하지 않아도 사회로부터 '불쌍하다' '하자 있는거 아냐'라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쓸데없는 오지랖, 정해진 규칙에서 벗어나면 이상하게 바라보는 전체주의를 좀 버려야 한다. 게이나 레즈비언, 트렌스젠더 등 성소수자도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필가 전혜린(후에 따로 한번 다룰예정)이 사랑했던 독일. 자유로운 그곳에서 유학하다 돌아온 전혜린은 극단적 선택을 한다. 술과 담배를 즐겼던 그녀는 법학을 강요하던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한국 사회의 시선도 따가웠다. "여자가 왜 저래 조신하지 못하게"하는 헛소리 때문에 전혜린은 죽었다. 4차산업혁명이 본격화된 지금도 그렇다는 사실에 절망감이 든다. 여성상위 남성상위 이딴 거 따지지말고 그냥 한 사람이 자유롭게 살도록 내버려 둘수 없을까. 겉으로는 쿨한척 하면서 뒤로는 세세하게 따지고 재단하고 조져대는게 우리나라 사람들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