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이라는 이름의 폭력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이해해야만 한다.

by 작가 전우형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사회생활은 참 어렵다. 복잡한 관계와 엇갈리는 갈등 속에서 어려움을 느낀다. 일도 일이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일이 어려울 때는 힘이 들지만, 사람이 어려울 때는 괴롭고 진이 빠진다. 힘들 때는 쉬면 괜찮아지지만, 괴로움은 그 사람과 함께 하는 한 무한루프처럼 삶의 주변을 맴돈다.


감정의 문제는 우리가 감정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괜한 말을 건네었다가 서로 불편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상대방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수많은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감정과의 대화시도를 주춤하게 한다. 낯선 존재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라 느낄수도 있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스스로에 대한 불안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겪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가족의 죽음과 같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괴로운 사건일 때도 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이 몰래 험담을 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뒤늦게 들었을 때나, 나는 ‘썸’ 정도는 될 거라 생각했던 상대가 알고 보니 나에게 아무런 호감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와 같이 숨기고 싶은 사건들도 있다. 주위 사람들이 ‘뭐 그런 일 가지고 그래? 괜찮아! 털어버려.’라고 말폭탄을 던져댈수록 괴로움에 외로움까지 더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울컥해지고 괜히 자책까지 된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런 걸까...’ 고민이 앞서고 내가 싫어진다.


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참 어렵다. 느낌은 비슷한데, 상황은 매번 다르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은 같은데, 강연을 들을 때는 감동적이고, 운전하는데 갑자기 끼어드는 차를 보면 깜짝 놀란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다 보면 당황스럽고 하지만 분노도 치밀어오른다. 캄캄한 밤에 혼자 누군가를 기다릴 때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찜찜하고 불안함을 느낀다.


어렸을 때는 이럴 때 엄마를 찾거나 울음보를 터트렸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이런 것들을 부끄럽게 여긴다. 왠지 감정을 드러내거나 누군가에게 기대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것처럼 여겨진다. 불완전한 어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감정을 꾹꾹 눌러야 한다. 자신을 속이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은 감정 자체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다. 사회생활에 유능한 사람은 여기에 더해 자신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는 것처럼 보인다. 연기자와 같이 원하는 감정을 ‘연출’하고 필요에 따라 ‘페르소나’를 장착하는 그들을 본다. 점점 더 감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진짜’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유한한’ 동물이다.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은 진실로 ‘참’에 가깝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환상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의지력에는 한계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체력의 한계는 인정하면서도, 의지력에는 한계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다. 사람이 무한정 달릴 수는 없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냥 네가 참아'라는 말을 쉽게 던진다. 이것은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사람에게 계속 달리라며 채찍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풀어야 하는 관계의 함수 속에서 모든 답을 찾기는 어렵다. 그래서 차선책을 찾아나선다. 그 결과물이 바로 ‘내가 참는 것’이다. '그냥 내가 참고 말지. 그래, 내가 양보하자’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주관이 있고 생각의 자유가 있다. 이것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에게 맞추는 일은 결코 공짜로 이뤄지지 않는다.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해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눌러야 하며, 무심코 튀어나오는 말을 삼키기 위해 '꿀꺽'하고 침을 삼켜야만 한다. 하지만 모든 생각은 헛점이 존재한다. 상대의 생각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그가 내세우는 정의의 햇살 같은 면에 집중해야 한다. 이면에 존재하는 어둠을 보는 순간, 숨어있던 비판의식이 고개를 번쩍 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참고 만다. 그런데 이 ‘그냥’이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무서운 단어다.


'그냥 화가 나고, 그냥 불안하고, 그냥 외롭다.' 생각해도 잘 모르겠고, 복잡하기만 할 때 우리는 주로 ‘그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이유를 찾는 것을 멈춘다. 그러다 보면 불쑥 화가 치미는데 왜 그런지 모르는 경우를 만난다. 깊은 호흡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는 나에게 주위 사람이 "무슨 일 있어?"라고 물으면, “아 몰라, 그냥 짜증 나”라고 대답해버리고 만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안절부절못할 때가 있다. 왜 그러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네. 그냥 좀 불안한가 봐.”라고 대답하고 만다. ‘그냥’이라는 단어에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럴 때 갑자기 지나가던 누군가가 어깨를 툭 하고 치고 지나가면 여지없이 분노가 폭발하고 만다. “이봐요. 사람을 치고 갔으면 사과를 해야 할 것 아니에요!” 별것 아닌 일에 하루의 기분을 망쳐버리게 된다. “이것 봐. 오늘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차에 새똥이 잔뜩 떨어져 있네. 오늘은 역시 날이 아니었나봐" 무고한 오늘 하루가 욕을 먹는다.


모든 것에 심각해질 필요는 없지만 어째서 내가 더이상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는지 분석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다. 해결되지 못한 감정은 결코 그냥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이라는 폭군에게 억압되어 있던 감정들은 어떻게든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럴 때 나도 몰랐던 ‘내’가 튀어나온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가 된다. 자책 속에 '또 그러면 어쩌지?' 걱정과 불안이 반복된다. ‘혹시 나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분노조절장애?!’ 두려워지고 남들에게 들키면 안 될 것이 느껴진다. 이것이 알려졌다가는 사람들이 나를 정신이상자 취급할 것 같다. 그래서 더욱 감정을 꾹꾹 누르기 시작한다. 절대 들키지 않으려고 강박적으로 숨긴다. 숨기고 누르는 것이 습관이 된다. 이런 과정은 결코 한 번만 일어나고 끝나지 않는다. 하나의 감정을 처리하는 패턴이 되어 반복적인 부정적 자기평가의 함정에 빠지고, 비판이 아니라 비난을 하고, 자신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심판하려 한다. 자신으로부터 쏟아지는 무자비한 비난에 의해, 자존감은 구덩이를 파고 땅속으로 들어가버린다.




화가 났을 때, 불안함을 느낄 때, 혹은 깊은 외로움에 휩싸이거나 허탈해질 때.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과정을 건너뛰고 ‘그냥’ 지나치면, 원인을 찾지 못하게 된다.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통제할 수도 없고 다스릴 수도 없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우리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갑자기 어떻게 튀어나올지 알 수 없을 때 우리의 몸은 더욱 움츠러든다. 이것은 마치 우리 주변에 코로나 확진자가 누군지 모를 때와 같다.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바깥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움츠러들고 닫힌 마음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도 단절시킨다. 마음의 문에 빗장을 걸어 잠근 채, 어두컴컴한 동굴로 들어가다 보면 종래에는 아무런 빛도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곳에 도달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할 때 자신과의 대화는 완전히 단절되고 만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자신을 보살필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성공은 건강한 삶이나 행복과는 별개의 문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 있다. 이성과 감정은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반쪽짜리 성공은 감정을 누를수록 더욱 빛이 나는 것 같다. 냉철한 이성을 겸비한 인재.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던 캐치프레이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순간은 감정과 함께 한다. 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감정을 누르고, 때로는 놓치고 사는 것은 삶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 역시 공감하지 못한다. 이들은 거리낌 없이 갖은 종류의 폭력을 휘두르는데 능하다. 권력에 취해 아랫사람을 무시하고, 갑을관계에 기대어 기발한 형태의 분노와 폭력, 시기, 증오들을 주위로 비산시킨다. 상대방이 자신으로 인해 상처 받을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와 다를 바 없다. 벌어지는 결과의 정도만 다를 뿐 그들이 행동하는 매커니즘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상처를 상상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감정을 이해하는 법은 우리가 고개를 박고 공부하던 교과서에는 나와있지 않다.


기술과 지성으로 중무장한 인간은, 합리성과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앞서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동물이었다. 우리가 내리는 선택과 결정은 사실 누군가에 의해 ‘내려진’ 것들임을 인정해야 한다. 주위 사람의 말 한마디에, 또는 상황 변화에, 때로는 자신의 해석에 따라 흔들리고 조종당하기 쉬운, 인간은 그런 존재다.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만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고유한 한계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이다. ‘그냥’ 느껴지는 감정에도 반드시 배경이 있다. 과거는 현재에, 현재는 미래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이제는 ‘감정’을 공부해야 한다.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것을 이해해보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덜 감정적인 사람으로 거듭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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