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떤 죽음이면 '잘 죽었다' 할 수 있을까?

삶의 끝은 죽음이므로

by 작가 전우형

죽음을 앞둔 한 사람이 있다. 그를 바라보는 심정은 복잡하다. 미웠던 사람인데 비쩍 마르고 곳곳에 무언가를 주렁주렁 단채 호흡만 간신히 하고 있다. 왠지 조금 안타까워지려 한다. 마음속으로는 죽음보다도 더한 증오를 퍼부어댔던 사람인데 이제 와서 안타깝다고? 내 마음을 나도 알 수가 없다. 증오는 오히려 나를 병들게 하지만 어떤 증오는 내려놓아지지 않는다. 그를 한껏 미워해도 채워지지 않는 느낌. 더 화를 내어도 부족한 느낌. 평생을 두고 곱씹어도 모자랄 것 같은데 벌써 죽는다고 한다. 죽음이 최고의 형벌이라면 나는 그에게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그는 이제 곧 죽을 사람인데. 그런데 막상 그를 보니 눈물이 맺히는 이 감정은 뭐지?


병간호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아니 힘들다기보다 지긋지긋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병간호하는 사람은 함께 병들어간다. 환자와 보호자. 두 사람의 안색은 비슷하다. 검고 어둡고 고통에 찌들어있다. 긴 투병을 함께하다 보면 초기의 안타까움은 상쇄되고, '저 인간 좀 안 죽나, 이제 죽을 때도 된 것 같은데' 하며 상대방의 죽음을 기대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위급해져 응급실로 달려갈 때 놀람과 다급함, 그리고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기대감이 함께한다. 추한 자신의 내면을 발견할 때 화들짝 놀라고 자신에 대한 역겨움마저 느낀다. '내가 그의 죽음을 바랐다니. 나는 인간도 아냐.' 하지만 이런 생각은 긴 투병생활 중간에 한 번씩 고개를 든다.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대로, 옆을 지키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힘들고 지친다. 몸도 마음도 지쳐 가다 보면 하늘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모든 것이 사치인 것 같고 세상의 행복과 아름다움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이 무료해진다.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옆사람에 대한 예의다. 적당히 아프다 빨리 떠나 줘야 산 사람이 온전히 살아간다. 상대방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 날것의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을 정도로, 그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애통하고 비통한 슬픔만을 유지할 수 있을 때 떠나 주는 것이 좋다. 사람은 언젠가 간다. 명줄을 길게 늘여도 행복한 시간으로 채울 수는 없다. 마지막 순간이 언제 올 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현재의 삶을 선물같이 살아간다면 죽음의 순간을 눈물로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은 모두에게 동일하지 않다.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시간은 내일 아침 일곱 시. 이제 12시간이 남았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모든 것들을 정리하기에 12시간은 너무 짧다. 그동안 허무하게 보냈던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고개를 든다. 왜 그토록 빨리 지나가버리기만을 바랐을까? 일상은 그토록 지루했을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문득 지나가버린 시간이 아까워진다.


어떤 경우에 시간은 엿가락처럼 늘어나서는 좀처럼 지나가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갈까. 힘든 순간은 길고 고독하고 끈적거린다. 신발 바닥에 붙은 풍선껌처럼 온갖 지저분한 기분을 덕지덕지 붙이며 나를 잡아당긴다. 긁어내고 뜯어내 보지만 끈질김은 소가죽같이 질겨서 결국 제풀에 나가떨어지고 만다. 할게 많을 때면 시간은 약 올리듯 더 빨리 흐른다. 한건 없는데 몇 시간이 훌쩍 흘렀다. 마감은 다가오는데 프린터는 더디기만 하고 초조한 눈으로 기다리는 이가 있을 때 짧은 몇 초는 몇 시간처럼 답답하다.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지난하고 외로운 일이다. 간절히 기다릴수록 기다림의 시간은 더 크고 길게 느껴진다.


죽는 순간은 어떤 느낌일까? 당신은 지금 물속에서 숨을 참는 중이다. 시간의 흐름이 초 단위로 명징하게 느껴지고 1분은 족히 지난 것 같은데 고작 15초가 지났을 뿐이다. 조금씩 가슴의 압박이 더해지고 입속은 무언가로 가득 찬다. 호흡곤란으로 힘들다고 느껴질 때가 시작이다. 답답함을 이기기 위해 물을 조금 마셔보기도 하고 머금었던 호흡을 조금씩 내뱉어보기도 한다.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어 물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 누군가가 머리를 짓누른다. 어떤 느낌이 들까?


당신은 병상 위에 누워있다. 의식은 또렷하지만 몸은 움직여지지 않는다. 조금씩 숨이 가빠오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입조차 벌려지지 않는다. 누군가 내 상태를 좀 알아주길 간절히 바라보지만 눈꺼풀조차 말을 듣지 않는다. 정지된 육체에 갇힌 채 죽어가는 느낌. 살기 위한 몸부림조차 불가능할 때. 가빠오는 숨을 들이켤 수도 내뱉을 수도 없을 때. 그런 고통이 죽는 순간에 느끼는 고통일까?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죽음의 고통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죽음의 미지성은 공포를 더욱 자극한다. 운명을 다른 무언가에 맡겨야 하는 느낌. 절망과 의존. 무력감. 뒷덜미를 잡힌 고양이와 같은 느낌. 고양이는 뒷덜미를 잡힌 순간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축 늘어진다. 그것은 항복일까 포기일까?




언제까지 살 것인가? 또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종착역은 죽음이므로 '언제'까지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흔히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 한다. '건강하게'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의 답이며, '오래'는 언제까지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얼마나 오래 살면 만족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순간이 올까? 이 정도면 충분히 살았으니 이제 떠나도 여한이 없다고 느낄 인생의 시점이 있을까? 생에 대한 욕망은 죽음을 담담히 맞이할 수 없게 한다. 적극적으로 죽음을 거부하고 또 회피하고 싶게 만든다. 그것은 죽음이 가진 신비성에서 기인한다. 살아있는 한 누구도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사후세계는 미지의 영역이다. 죽음이 끝인가, 끝이 아닌가에 대한 논란은 수천 년간 계속되어 왔다. 사후세계를 경험하고 다시 살아난 사람이 책이라도 써서 남기지 않는 한 우리는 사후 영역에 대한 짐작만 할 뿐 간접경험조차도 하지 못한다.


죽음은 자신만의 문제는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에게는 '상실'이다. 관계 맺음을 통해 공유한 부분이 얽히고설켜 따로 떼어내기 힘든 관계가 될 때, 죽음은 상실이 된다. 잃어버린 마음의 공간.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낸다.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 잃어버린 것은 추억일까, 사랑일까, 그리움일까. 사자를 기억하기 위해 가끔 오래된 사진첩을 열어본다. 사진 속에 함께 웃던 그 사람은 이제 더는 이곳에 없다. 그와 영원히 함께 할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이토록 갑자기 가버릴 줄은 몰랐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기에 더욱 가슴 아프다.


인간은 결국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내가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 스스로 선택하고 싶은 욕망은 있다. '잘 죽는다'는 것은 결국 죽음 이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꿈을 바라보려면 우산부터 접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