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었다고 해서 다 믿어선 안 돼" "하지만 텐진은 제 형이에요. 그 터널 안에서 일한다고요. 형 말처럼 진짜 종말이 닥치면... 그럼 어떡하죠?" "....." 티베트 고승은 어린 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없이 주전자를 들어 찻잔을 채우기 시작한다. "가득 찼어요!" 찻잔은 이내 가득 차 넘쳐흐르지만 고승은 멈추지 않고, 제자가 한차례 더 제지한 후에야 차 따르기를 멈춘다. "이 컵처럼 넌 생각으로 가득 차있구나. 지혜를 얻으려면 네 컵을 비워야만 한다."
<영화 2012, 티베트 고승과 제자의 대화 중>
캄캄한 밤, 전화벨 소리가 들리고 한 여자아이가 전화를 받는다. 전화에서는 늙수그레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미안하지만 누구니?" "요코 델가토에요. 아빠 바꿔줄까요?" 노인은 한차례 숨을 고르고는 대답한다. "그래 주겠니?" "근데 누구세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노인. "... 네 할아버지란다." "우리 할아버지요?" "그래, 할아버지야." "아빠, 할아버지 전화야!" 부부는 놀란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낡은 손녀의 사진을 보며 기다리는 노인. 잠자리에서 일어난 남성은 전화기를 받아 들지만, 그 자리에 선채 망설이고 있다. 아내를 한차례 바라보고 마음을 정리한 그는 결심한 듯 무언가 말하려 하지만 갑자기 땅이 흔들리고. 아들의 목소리를 기다리던 노인의 귓전에는 둔탁한 파열음과 비명소리가 들리다 전화는 끊어져버린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는 노인.
<영화 2012, 연락을 끊고 지냈던 부자간의 마지막 대화 중>
'인디펜던스 데이', '투모로우'를 제작했던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2012'는 지구종말적 재앙을 배경으로 한 SF 재난영화다. '볼케이노', '아마겟돈' 등을 시작으로 재난물에 푹 빠져있던 시절이 있었다. 유난히 재난물에 빠졌던 이유는 재난상황을 실감 나게 그려내는 특수효과가 재미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재난물이 부여하는 극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갈등, 절망, 극복, 깨달음, 회복, 치유, 화해, 화합 등의 일련의 심리 변화가 흥미롭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의 카타르시스. '아마겟돈'에서는 아직 젊고 창창했던 브루스윌리스가 운석을 폭파시키기 위해 버튼을 누르던 장면이 기억난다.
1. 지혜를 얻으려면 네 컵을 비워야만 한다.
상기한 두 장면은 영화 '2012'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추린 것이다. 첫 장면은 티베트 고승과 제자와의 대화에서 시작한다. 지구종말의 위기를 예측해낸 후 티베트 초밍계곡에는 모종의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주민들에게는 거대 터널공사가 진행되는 것처럼 속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고, 기술이 있었던 텐진(형)은 그 프로젝트가 무엇인지와 배경에 대해 동생에게 말해준다. 이 장면은 그 이후의 상황이다. 형으로부터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들은 제자가 고승에게 가서 어찌해야 할지를 묻는 장면. 그때의 뼈 때리는 대답이 바로 "이 컵처럼 너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구나. 지혜를 얻으려면 네 컵을 비워야만 한다."라는 내용이었다.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는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미움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사랑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다. 아집과 독선으로 가득 찬 사람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행복을 담으려면 해묵은 원한과 감정의 찌꺼기들을 비워야 한다. 삶의 변화를 원한다면 과거에 형성된 나쁜 습관들을 비워내어야 한다. '지혜를 얻으려면 네 컵을 비워야만 한다.'는 이 말은 나에게 다른 메시지를 전달해주었다.
2. 마지막 인사는 하고 싶었는데
'괘씸한 녀석. 아비 말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살겠다고 나가버렸지. 그렇게 수십 년간 연락도 끊고 살았던 아들 녀석이었는데, 왜 이제야 목소리가 듣고 싶어 지는지...' 사람은 마지막 순간이 눈앞에 다가올 때 비로소 지난 시간을 아쉬워한다. 오랜 친우와 함께 크루즈선에 올라 선상에서 노래를 부르던 노인 역시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전해 듣는다. 한참을 고민하다 아들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만다.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 짧은 침묵 안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지 않았을까? 황망하고 갑작스러운 이별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하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면 너무 늦기 전에 전했으면 한다.
사실 이런 재난물의 백미는 '재난' 그 자체다. 어떤 재난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표현해내는가에 따라 퀄리티가 정해진다. 그런 측면에서 땅이 갑작스럽게 꺼지고 슈퍼마켓 한가운데가 갈라지는 모습, 인간이 긴 시간에 걸쳐 만들어둔 수많은 건축물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리는 비현실적인 풍경, 옐로우스톤이 폭발하는 장엄한 장면, 용암으로 뒤덮인 하와이, 땅덩어리가 유성우처럼 쏟아져내리는 장면, 갈라진 틈 사이로 지하철이 튀어나오는 장면, 항공모함 '존 케네디'호가 해일과 함께 백악관을 덮치는 장면,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이 방주를 들이받는 장면 등은 벌써 10년도 더 지난 영화라고 하기에는 꽤나 뛰어난 퀄리티를 자랑한다.
쉽게 경험하지 못하거나, 결코 경험해서는 안 될 그런 일들이 재난물에서는 다뤄진다. 경험할 수 없는 상황이 배경이 되기에, 평소에 담을 수 없는 감정 변화나 심리묘사가 담아진다. 평소 같지 않은 상황에서 평소의 삶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 누구에게나 삶의 마지막 날은 오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직 꽤나 많은 시간이 있을 거야'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산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듯,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슬아슬한 균형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연결장치들이 너무나 세밀하고 긴밀히 연관되어 있어 작은 변화로도 당연하게 여겼던 많은 것들이 갑작스럽게 무너지고 해체되어버리기도 한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과 현재를 살아가는 것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문제라기보다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야 할 문제다.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가 되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고 미래는 어느덧 우리의 현실이 되어 있다. 각자의 시간은 한정적이다. 그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 재미있게도 나는 재난물을 보고 이런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과연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워야 할까. 선택은 후회를 부른다지만 후회 역시 자신의 선택이다. 그렇게 나는 영화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