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함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 완벽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평소보다 더 무리하게 한다. 지금보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 옆 사람보다 앞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이미 터질 듯 뛰고 있는 심장을 부여잡고 무작정 달리게 한다. 사회에서 한계를 넘어봤다는 이들이, 성공자라 부르짖는 이들이 만들어낸 판타지들로 인해, 마치 그토록 치열하게, 정열적으로, 모든 에너지를 끌어내어 달려 나가지 않으면 왠지 정체된 것처럼 여겨지고,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살거나, 평범한 일상 속 평온함과 안정감을 유지하며 살고 있는 것을 마치 '열심히 살지 않는', '꿈도 없는', '노력하지 않는', '포기한' 인생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한다.
웹소설이나 드라마 속 주인공에게나 존재할법한 판타지로부터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그런 비현실적인 삶을 모든 이에게 '이상적인 삶의 자세'로 설명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로부터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완벽하게 잘 해낼 필요도,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런 식의 완벽함은 인간이 가진 자연스러움과는 맞지 않는다.
완벽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한계를 뛰어넘으려 자신을 몰아붙이는 과정이 나에게 가져다줄 영광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남다른, 누구나 인정할만한, 괄목할만한 성공이나 업적을 이루어낸 이들의 이면에는 분명 그런 면이 존재한다. 어떤 종류의 일은 반드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매뉴얼을 정확히 지키거나 절대 실수가 발생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 의사나, 중량물이나 위험물을 다루는 안전작업에 종사하는 직업이 그런 종류일 것이다. 한 번의 실수가 누군가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파괴적일 수 있다면 행위나 선택 하나하나에 담긴 무게감이 굉장할 수밖에 없다. 그 무게감을 실감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미덕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완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어려움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더불어 그런 경향을 삶의 다른 부분까지 함부로 확대 적용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한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것,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것, 모든 이를 만족시키는 것'
이런 완벽주의가 만들어낸 비현실적인 바람들은 불가능한 기준을 나에게 적용하는 것이며, 그 결과는 피폐하고 지쳐버린 삶으로 이어진다. 정서적 자원이 고갈되면 자꾸 짜증이 나고 작은 일에도 화가 나고 내일 하루가 불안해진다. 아슬아슬할 정도로 가득 찬 탓에 내면의 공간이 넘칠것처럼 찰랑거리고, 약간의 흔들림조차 감당할 여유가 없다. 어떻게든 흘러넘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며 살다 보면, 아내가 며칠 동안 식은땀을 느낄 정도로 가슴에 통증을 느껴 병원을 다녀왔다는 것도, 학부모 참관수업에 자신만 아무도 오지 않아 무안하고 섭섭했던 딸아이의 마음도, 기다렸던 자전거가 도착해 즐거운 마음으로 타러 나갔다가 조립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넘어지고 무릎이 까져 엉엉 울었던 막내아들의 사정도 전혀 알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혹은 그런 일을 듣고도 그냥 아무 감정 없이 '어 그랬어? 아팠겠네. 못 가서 미안해" 이런 기계적이고 상투적인 대답으로 일관하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인생은 길고 관계는 짧다. 열심히 지켜내지 않으면 완벽해지기 이전에 완벽한 외톨이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그들이 언제까지나 내 옆을 지켜줄 이유는 없다.
'완벽주의' 벡터를 보상하는 방법
1. 욕구와 욕망을 구분한다
욕구의 정의는 '무언가 부족한 것을 채우고 싶어 하는 감정이나 심리 상태'이며, 욕망의 정의는 '인간의 행동을 야기시키는 동인'이다. 결핍을 해소하고자 하는 마음이 욕구라면, 욕망은 끝없이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다. 욕구가 욕망과 동일시되는 이유는, 결핍을 느끼도록 하는 기준이 과도하게 높게 설정되거나, 도저히 결핍을 해소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상태를 추구하다 보니 무언가를 바라는 것과 부족한 것을 채우는 마음의 빈도가 비슷해지고 그런 바람들이 서로 혼재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전교 1등', '상위 1%'같은 성취하기 대단히 어렵거나 불가능한 기준을 설정하고는, 늘 자신을 부족하다고 여기며 간혹 그 기준에 도달한 소수의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기 비하나 자책에 빠지는 상황을 흔히 본다. 당연하게도 전교 1등은 같은 학년에 단 한 명뿐이며, 상위 1%보다는 그 외 99%가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우리는 은연중에 그런 평범함 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비난하고 부정한다.
이런 식으로 과도한 기준을 충족시키려 하는 과정에서 결핍은 점점 더 해소되기 어려워지고, 이것이 만성적인 불만족 상태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성적이나 체력, 외모, 학력, 직업과 같이 단지 일부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에 불만족을 느낄 정도로 만성화되어버리면 점점 더 지쳐가고 외로움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스스로조차도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다 보니 헐벗어버린 마음 탓에 축 처진 어깨를 기댈 곳 하나 없는 느낌이 들고, 잠시 쉬어갈 나무 그늘 하나 없는 뜨거운 사막을 홀로 걷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런 나를 여전히 비난하고 무시하는 또 다른 내가 있다. 욕망의 노예가 된 나로부터 안전을 되찾으려면 필수적이어야 할 '욕구'와 적절한 수준으로 관리해야 할 '욕망'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겨울의 추위로부터 나와 가족의 생명을 지켜줄 따뜻하고 안전한 집이 있었으면 하는 '욕구'와 더 크고 좋은 집, 화려하고 넓은 집을 갖고 싶은 '욕망'은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허기를 채우고자 하는 '식욕'과, 더 달달하고 맛있고 자극적인 음식을 더 많이 먹고자 하는 '식탐', 고급 식재료를 이용해서 유명 셰프가 만든 음식을 먹고 싶은 '허영심'이나 '식도락'은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욕망을 표현하는 문장에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부사가 붙는다. 바로 '어떤 분량이나 정도 이상으로'라는 의미를 가진 '더'라는 부사다. '더 넓고 좋은 집', '더 빠르고 튼튼하고 안전한 차', '더 좋은 등수' '더 높은 직급' '더 많은 연봉' 그런데 과연 누구보다 더 많고 어떤 집보다 더 좋은 것이어야 할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만족의 기준으로 삼았다가는 차가운 관 속에 누워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미간의 주름은 찌푸려져 있을 수밖에 없다.
욕망은 사회적 성공이나 부를 축적하기 위한 폭발력 있는 연료가 되어주기도 한다. 욕망에 불타오르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니까. 하지만 과도하게 높은 기준은 오히려 절망의 씨앗이 된다. 끝이 없는 욕망에 브레이크를 걸어줄 유일한 자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적 기준'일 것이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기준은 어디까지인가? 어느 정도 연봉이면 만족할 것인가? 어떤 사람이면 만족할 것인가? '나'라는 사람에게 있어 어떤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어떤 것은 큰 스트레스 없이도 참아낼 수 있는가? '내적 기준'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에 대한 탐구가 우선되어야 한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종류의 고통을 버텨낼 수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은 치가 떨려하는지.' 이런 정보들에 대한 축적이 필요하다.
2.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완벽한 상태를 추구하는 것에는 커다란 반작용이 따른다.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 완벽해지려 할 때, 어쩌면 한시적인 완벽함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나,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른 소중한 것들에 쏟을 에너지는 필연적으로 부족해지기 마련이다. 한 사람과 깊은 사랑에 빠지면 다른 사람과 나눌 시간이 부족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벽 추구의 기회비용은 그만큼 다른 것들에 투자할 시간과 여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족과 함께할 시간, 친구들과의 관계, 건강, 행복, 즐거움, 여유와 같은 인간관계나 정서적 자원들이 그것이다.
물론 우리가 가진 유한한 자원, 그것이 내적 자원이든 외적 자원이든 간에, 그것을 이용해서 특별한 무언가를 달성하고자 한다면 선택과 집중은 필수적이다. 내가 무언가 이루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 평가는 우리의 삶을 더 향기롭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모든 면에서 완벽을 꿈꾸며 무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무모한 페이스를 따라오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한다. 매일같이 밤샘 작업이나 야근을 하고도 피곤하지 않기를 바라거나, 그 결과 중요한 순간에 몸살이 나는 자신을 허약하고 의지가 약하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내일까지 맡은 일을 끝내야 하는데, 업무의 양에 비해 주어진 시간이 터무니없이 짧은 것은 그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받아들이면서도, 마감기한을 준수하느라 허덕이는 자신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식으로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상황에 놓인다. 어떻게든 맞추고 해내야만 하는 강박 속에 꾸준히 노출되며 살아온 까닭이다.
차라리 자기중심적이고 남들이 뭐라 하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괜찮다. 그들은 내일까지 이 많은 일을 어떻게 다하라는 말이냐며 따지기라도 할 것이다. 오히려 성실한 성격을 가진 사람, 남들의 부탁이나 부당한 지시조차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 언제나 내가 더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고,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서 어떻게든 우물을 파보려는 사람들일수록 같은 상황에서 더 어려움을 겪고 스스로를 책망한다. 그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타인의 과도한 기준이나 불합리한 지시사항조차도 '반드시' 충족시켜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그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고 싶고, 나를 평가할 권한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삶을 갈아 넣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작 그들은 나의 삶을 책임져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3. 기준을 외부에 두지 않는다
욕망의 기준이 나보다 '남'을 향해 있을 때 문제가 된다. '어디 사는 친구의 초등학생 자녀는 벌써 중학생 교재를 마스터했다던데'와 같은 비교가 외부의 기준을 내면으로 끌어들이는 나쁜 비교들이다. 비교 대상은 언제나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며, 만약 그 기준이 충족되면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기준을 높여버린다. 이런 식의 기준은 절대 충족할 수가 없다. 그래서 멀쩡하게 학교 잘 다니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내 아이가 왠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뒤쳐지는 것 같고, 지금처럼 놀게 놔두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다들' 그렇게 자녀교육에 힘쓰는데 나만 너무 성의 없이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지고 조급해진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무엇을 위해, 어떤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내 아이도 교육열이 치열한 동네로 전입해서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생 수준의 교과서와 시름하며 보내야 할까? 친구들과 즐겁게 놀며 인간관계의 기초를 형성할 시기에 단어나 수식들과 놀아야만 할까? 아이는 그것을 원할까? 사실은 공부 잘하는 아이를 둔 부모가 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무분별한 욕망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제동을 걸어준다.
기준을 외부에 두려고 할수록 내면의 불안은 더욱 자극된다. 다른 사람을 무작정 쫓아가려고 하는 과정에서 내가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고, 맞지 않는 기준에 나를 맞추려 하다 보니 불만이 일상이 된다. 번아웃 신드롬의 특징적인 점은 오히려 뛰어난 사람, 근면 성실하고 타인의 평판이 좋은 사람, 평소에 화내는 모습 한번 보이지 않던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점이다. 이처럼 성실하고 고지식한 사람들일수록 자신에 대한 무척 높은 기준을 세운다. 제멋대로이고, 타인을 신경 쓰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번아웃 신드롬으로부터 차라리 자유롭다.
나를 활활 태워서 마라톤 선수를 쫓아가려고 할 필요 없다. 페이스를 오버하면 5km 지점을 통과할 때까지는 선두를 유지할지 모르지만 42.195km를 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간도 못가 '번아웃 신드롬'으로 쓰러지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의 페이스를 찾으려면 적절한 호흡, 보폭, 자세, 체력, 발에 맞는 마라톤화 등이 필요하다. 당연하게도 이런 요소들은 '나의 상태'를 기준으로 맞추어야만 한다. '축구의 신' 메시가 신었던 축구화를 따라 신었다고 해서 나도 그와 같은 축구의 신이 될 수는 없다. 남을 따라가는 형태로 기준이 만들어지다 보면, 그 기준은 나에게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혼란과 불안만 가중시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