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지구와 달의 기싸움에 이리저리 휩쓸려간다.
달토끼는 물이 귀하다 재촉하고
달토끼는 물이 귀하다 재촉하고, 반죽에 필요한 물을 구하기 위해 달은 부지런히 지구 주위를 공전하며 바닷물을 야금야금 잡아당긴다. 7살 동생이 9살 형 주위를 이리저리 맴돌며 약을 올리는 것처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지구와 달 사이에 머리끄덩이 잡아당기는 싸움이 벌어진다. 그들의 미묘한 밀당 속에 바다는, 이제는 보기 힘든 '진격의 오빠부대'처럼 달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하고, 지구는 극심한 중2병 아들을 둔 부모의 마음으로 집 나간 바닷물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안간힘을 쓴다. 하루에 두 번씩, 때로는 한 번씩, 바다와 땅은 중립지대인 갯벌을 두고 지리멸렬한 고지전을 반복해야만 하고, 6.25 전쟁 당시 북한군과 한국군이 교대로 드나들던 교착 지대의 주민들처럼, 갯벌의 생명체들은 축축한 바다뿐 아니라 육지의 메마른 환경에도 적응해야만 했다.
바다도 흔들리고 사람의 인생은 더 격하게 흔들리지
우리의 인생이 세파에 이리저리 휩쓸려가는 것처럼, 바다 역시 수많은 외력에 의해 움직인다. 대양을 가로지르는 해류, 연안바다 곳곳을 누비는 연안류, 곳곳에서 덩어리로 맴도는 와동류, 냉수와 온수를 수직으로 뒤섞는 용승류, 조석에 따라 방향이 바뀌는 창조류와 낙조류 등 바다를 가만히 두지 않는 수많은 흐름이 있다. 바람은 파랑을 만들고 파랑이 모여 너울을 형성한다. 태풍은 바다를 완전히 뒤엎어버리기도 하고 계절의 변화는 바다의 표정을 바꾸어버리기도 한다. 면면부절한 바다의 고요하고도 묵직한 흐름 위에선, 10만 톤급 초대형 상선도 격랑에 떠내려가는 나뭇잎처럼 위태롭고 미약할 뿐이다. 거대한 바다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이대호 선수도 무지개를 뿜게 만들고, 바다의 분노를 정면으로 대면해본 후에야 인간은 그동안 망각해왔던 겸손을 다시 장착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다 위에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오로지 하늘뿐
바다에서 자신의 위치를 구하려면 옆을 보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항구를 벗어나 망망대해 위에 서면, 익숙했던 육지의 수많은 물표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고개를 아무리 돌려보아도 바다, 바다, 오로지 바다뿐이다. 바다에는 인간이 만들어둔 절대적 기준이 없다. 모든 것은 변하고, 심지어 나의 위치도 한 자리에 고정시키지 못한다.
막막함으로 숨이 막힐 것 같은 그때, 유일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늘이다. 익숙했던 모든 것이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하늘은 내 머리 위를 우산처럼 굳건히 지켜주고 있다. GPS를 비롯한 항법 계기가 발달하기 전까지 바닷길을 알려줄 유일한 수단은 하늘이었다. 눈을 어지럽혔던 수많은 일상의 불빛이 사라지고 나면, 바다 위에 이미 존재해왔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빛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은 금붙이가 수놓아진 화려한 궁장 미부의 치맛자락 같기도 했고, 은하수 사이를 이어주는 오작교의 단아한 미소 같기도 했다.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자신의 빛을 밝히는 수많은 별들 사이로 갈 곳 잃은 희미한 빛 덩이 하나가 나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을 때, 희미하게나마 가야 할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밤하늘은 은밀하고 변함없는 방식으로 인생의 항로를 밝혀주는 유일한 등불이 되어 주었다.
잔잔한 바다에 파문을 일으키는 존재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위를 유일하게 어지럽히는 존재가 '나'일 때도 있었다. 그 잔잔함은 이내 사위를 가득 채운 안갯속에 갇혀버리기도 한다. 배의 앞머리조차 안갯속에 파묻힌 '시계제로'의 상황에 놓이면 눈을 있는 힘껏 치켜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타의에 의해 눈뜬장님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들리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그동안 들리지 않던 바다의 목소리가 고요함을 틈타 귓전을 맴돌기 시작한다. 해무는 바다의 전령인 탓이다.
사실은 인생은 꽤나 공평했다고
종종 그렇지 않다고 불평하지만, 인생은 꽤나 정직하고 공평한 것 같다. 그래서 하나를 잃어야 다른 하나가 보인다. 육지에서 멀어지면 바다가 보이고, 불빛이 사라지면 그제야 언제나 하늘을 수놓고 있었던 별빛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자욱한 해무가 바다 위를 온통 덮어버릴 때면, 그동안 들리지 않던 바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잔잔한 파도가 선체를 어루만질 때의 찰박거리는 소리. 뱃머리가 파도를 가를 때 들리는 물이 양갈래로 찢어지는 소리. 울림통이 큰 하마가 웅얼거리는듯한 MTU 엔진의 진동음. 추진축의 유막과 관통구 사이의 묘한 마찰음. 프로펠러가 고속으로 회전하며 물덩어리를 뒤로 밀어내는 소리. 퍼드덕거리는 갈매기의 날갯짓 소리. 무언가를 낚아채는듯한 물장구 소리. 수면 위를 가까스로 스쳐 지나가는 해풍의 구슬픈 노랫소리. 파도가 부서지면서 생기는 다소 거친 빗질 소리. 한주먹 가득 쥐고 있던 모래가 손가락 틈으로 사락사락 빠져나가는 듯한, 귀 끝을 간질이는 질감의 소리들이 안갯속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비산되고, 그중 일부만이 귓가에 도달해 바다의 전령사 역할을 완수한다. 거세지는 바람소리와 함께 시릴 정도로 투명한 푸른빛이었던 바다 위에 하얀 포말들이 고개를 들고, 백파와 함께 거친 풍랑이 찾아왔다. 날씨가 나빠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힘든 순간은 언제나 연달아 찾아오지
절박한 순간은 때때로 연달아 문을 두드리고, 그 절박함이 촉매가 되어 잠재된 불안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불안은 조급함을 부추기고, 시야를 좁게 만든다. 시야가 좁아지는 것은 불안의 원인에 집중하기 위함이지만, 불안과 긴장이 촉발한 내적 흥분 탓에 눈동자는 흔들리고, 평소였다면 충분히 알아차렸을 평범한 단서들조차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순간에 필요한 것은 한 걸음 물러설 수 있는 정서적 공간이다. 그 공간을 확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잠시 '눈을 감는' 것이다.
사람은 시각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고,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그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불안에 떠는 원인은 조급한 마음에 있고, 마음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다. 마음속에 떠도는 그런 불안들은 눈앞의 잔상을 차단했을 때 비로소 명확하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잠 좀 자자, 잠 좀!
때때로 너무나 바쁘고 시간이 부족한 나머지, 수면을 죄악시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 생각은 너무나 폭력적이고 잔인하다. '4시간 자면 서울대 가고 7시간 자면 지잡대 간다'는 식의 비틀어진 학벌 의식도, '지금 잠이 오냐?'는 원색적인 비난도, '잠잘 시간이 어디 있냐'는 고문에 가까운 재촉에 이르기까지, 모두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말들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살기 위해서는 잠을 자야 한다. 인생이 절박한 만큼 우리는 절실하게 잠을 자야 한다. 풀리지 않은 피로는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예민해진 감각은 작은 신호를 더 크게 받아들이며 그렇지 않아도 불안에 떨던 불안을 자극한다.
수면은 삶의 주도권을 회복을 관장하는 쪽에 잠시 내어주는 행위다. 잠든 동안에도 심장은 뛰고 호흡은 멈추지 않는다.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도 신체의 일부는 제 기능을 수행하고, 그런 기능은 '자율'신경계에 연결되어 작동한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 애쓰던 '의식'이 잠든 순간에서야 비로소 무의식에 연결된 모든 자율신경들이 몸을 지배하며 지친 몸을 회복하고 소모한 에너지를 보충해주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절대'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잠은 절대 '선'에 가깝다고 본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을 때 한 줌의 호흡도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공통 과업일 것이다. 기울어지기 쉬운 일상의 균형을 되찾아주기 위해선 꽉 쥐고 있던 두 손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지혜도 필요하다. 잠을 자는 것은 기울어진 일상의 무게추를 '회복'의 시간으로 돌려주는 소중한 과정이며, 적절한 수면은 행복지수를 정상범위로 끌어올리기 위한 필수요소다.
깨달음은 아무 때나 찾아오지 않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앞이 캄캄해지고 나서야 깨닫는 인생의 역설 속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무수히 많다는 것도 인생의 골짜기에 도달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우울증이라는 어두컴컴한 골목을 헤매다 막다른 길에 서보면, 그동안 평가해온 자신의 모습에 사실은 볼품없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거품이 빠진 내 모습은 극히 평범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람은 사실 자신의 마음조차 의지대로 휘두를 수 없는 존재고, 그동안 비웃어왔던 사소한 삶의 문제들을 좀처럼 사소하게 여길 수 없게 된다. 삶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번갈아가며 평균치로 수렴해간다. 그 평균이란 곧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함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일 것이다.
오늘의 좌표는 어디쯤일까
우리의 현재는 9부 능선의 어디쯤에 와 있을까? 바다에서처럼 인생의 여로에서도 위치를 찾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어디쯤일까? 오르막일까, 내리막일까. 인생에는 영원한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다. 깊숙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오늘도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가능성의 우주가 또 다른 길을 열어주길 바라며. 사소한 바람 하나쯤 기댈 곳이 있지 않을까 스스로를 위안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