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집이 생겼어요. 30년 월세 살이지만...
오픈 시간에 맞춰 농협은행을 찾았다. 새집을 구입하기 위한 대출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관사 이곳저곳을 전전하느라 내 집 마련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매년 새로운 근무지로 옮겨야 했고, 해군 장교는 한 곳에 정착이 불가능한 직업이었다. 익숙해질 만하면 새로운 부서로 전입해 생소한 업무와 환경, 그리고 사람들에게 적응하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직업군인 중에서도 부사관에 비해 장교는 인사이동이 더욱 잦았다. 그러다 보니 막상 내가 다른 근무지로 이동하지 않더라도 겨우 팀워크를 맞춰둔 소중한 동료들이 떠나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새로운 사람들과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 들 때가 되면 내가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는, 그런 한숨 나오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직업군인으로 복무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조금씩 새로운 근무지에서도 구면인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늘어갔다. 그런 느낌이 든 건 대략 임관 5년 차에 접어들던 시점으로 기억한다. 근무지 역시 예전에 일했던 곳과 유사한 곳으로 배정받기도 했다. 해군 장교 생활에 점차 익숙해져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매번 이사 다녀야 하는 상황은 나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여러모로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다. 아이들은 친한 친구를 사귀지 못했고, 가구는 부서지고 망가져 새로 구입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때서야 가족을 두고 혼자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선배장교들의 모습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들이라고 가족과 함께하고 싶지 않았을까. 동서남해 모든 해역을 두루 경험해야 부대지휘에 필요한 역량을 갖출 수 있다는 군 인사 목표는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해군 장교의 주거안정성은 정말이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잡다한 회상은 잠시 접어두고. 어쨌든 결혼 이후 자의로 이사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내와 나의 공동명의로 집을 구입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인감등록'이라는 것도 삼십 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에서야 해보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별생각 없이 카페에서 가까운 주민센터를 찾아갔다가 등록된 주거지 관할 주민센터로 가야 한다는 안내에 한번 더 발품을 팔아야 하기도 했고, 자아정체성을 상실한 엄지손가락 탓에 지문인식을 수차례 다시 하기도 했다. 눈 앞에서는 여전히 대출담당 직원이 바쁜 손길로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문득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 집을 사는 것이 좋은 선택일까? 과연 이번 집에서는 오래 살 수 있을까? 인생 한편에 공고하게 자리 잡은 '역마살'이 곱게 떠나 줄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살다 보면 결국 살아온 대로 살게 되더라'는 인생 선배들의 말도 잠시 떠올랐다.
나 같은 집돌이가 1년의 3분의 2 가량을 집을 떠나 망망대해를 떠돌아야 하는 생활을 어떻게 선택할 수 있었을까? 잘 떠오르지 않는 스스로의 과거사를 가만히 짐작해본다. 아마도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가능했을 것이다. 해군사관학교가 어떤 곳인지, 어떤 목적으로 설립되었는지, 어떤 생활을 하고 그곳을 졸업하고 나면 어떤 인생을 살게 되는지,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아무 정보도 없이 도망치듯 집을 뛰쳐나왔다. 아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등록금이 무료이며 의식주가 모두 해결된다는 것. 심지어 '품위유지비'라는 이름으로 약간의 월급도 준다는 것. 물론 그 모든 것이 결코 '무료'가 아니라는 사실은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그저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대학을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겐 가장 중요했던 모양이다.
수능을 망쳤다는 생각에 재수를 떠올리며 절망에 빠져있던 나를 구원해준 감사한 곳. 당시의 내가 사관학교를 마다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에 있어 철없을 만큼 단순하고 용감했던 그 시절. 부모님 사이의 드러나지 않는 불화를 온몸으로 체감하던 나는 질식할 것 같은 집구석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고, 사관학교는 그 모든 고민을 한 번에 날려줄 최선의 해결책으로 보였다. 물론 그 기쁨은 가입교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라는 후회와 절망으로 바뀌긴 했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이 지옥에 가까웠지만 그저 퇴교당해서 집으로 돌아가기 싫다는 일념으로 악착같이 버티고 또 버텼다.
"이제 표시된 곳에 이름 쓰고 서명해주시면 됩니다." 대출상담직원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잠시 앉아서 기다리라던 은행 직원은 한참 동안 우리를 꿔다논 보리자루처럼 앉혀둔 채 홀로 서류를 체크하느라 분주했고, 그 멍 때림의 시간은 '내가 어쩌다 해군 장교가 되었던 걸까?'에 대한 회상을 세 번 정도 돌려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두툼한 서류를 보며 아내와 나는 잠시 애매한 표정으로 서로의 안색을 살폈다. '너도 똑같지?'라는 무언의 눈길이었다. 두터운 A4 크기의 복사방지 용지에 빼곡히 기재된 내용들은 독서를 취미로 하는 나조차도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집중해서 읽어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쓰인 것도 모자라 법률용어나 금융용어로 도배된 각종 약관과 여신금융 관련 계약사항들은 도무지 집중해서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한글로 쓰인 외국어를 보는 기분이랄까. 마치 본인 외에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작정하고 쓴 것처럼 '가독성 제로'의 글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쓰면 작가로서는 완벽하게 망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잡다한 심상들을 잠시 밀어 두고 단순작업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런 때일수록 생각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최선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표시된 곳에 대출 내용이나 금액, 이름, 날짜 등을 쓰고 동의란에 체크를 해나갔다. 간혹 '위 내용을 모두 숙지하였으며', '본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임을'과 같은 문구를 따라 쓰기도 했다. 단순작업을 하는데만 해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고, 직원은 다시 서류를 꼼꼼히 체크하며 아내와 나의 인감도장과 은행의 직인을 곳곳에 찍기 시작했다. 간혹 서류를 넘겨보다 기재되지 않은 곳을 발견하면 "여기도 써주시고요"하는 과정도 몇 차례 반복했다.
그토록 '꼼꼼하게' 서류를 확인하며 빠진 곳 없이 서명은 했지만, '정작 내가 어떤 내용에 동의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 우습고도 슬폈다. 겨우 눈대중으로 읽어본 내용은 '대출조건이나 우대금리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음이 뒤늦게 밝혀지게 되면 이율이 변경되거나 대출이 취소되거나 밀린 이자를 내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성 문구들과 '매매한 아파트를 담보로 잡는 것에 대한 내용과 금액'과 관련돼 보이는 그런 내용들이었다. 세부내용은 당연히 파악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나는 대략 1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상대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30년간 내 인생을 좌지우지할 통 큰 대출'을 내용도 제대로 모른 채 실행하였으며, '모든 책임을 감수하겠노라'라고 자신 있게 서명했다. 한편으로 더 슬픈 사실은, 그렇게라도 대출받지 않으면 집을 구할 수 없는 엄혹한 현실이었다. 가족이 길바닥에 나앉게 할 수는 없으니 관련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다며 따지고 자시고 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부지런히 벌어서 죽기 전에 갚으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고 넘길 뿐이었다.
복잡하지만 짧은 과정을 통해, 결혼 13년 차에 접어든 우리 부부는 '공동명의'로 '내 집'을 갖게 되었다. 물론 엄밀히는 가질 '예정'이다. 30년 동안 셋방살이를 하며 이자와 원금을 꼬박꼬박 갚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왠지 몸이 땅에서 붕 하고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기쁨은 과연 얼마나 지속될까? 십수 년 국방의무를 다하고 받은 퇴직금은 방 셋 딸린 집 구할 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동안 벌어온 월급 또한 다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을. 갑자기 웃는 아이 셋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 큰 문제없이 건강하게 잘 컸으면 됐지. 뭘 더 바라겠어.' 이제 새집을 어떻게 꾸밀지 고민이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