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은 이럴 때 쓰라고 있나 보다
쌓인 설거지를 정리하고 커피를 내렸다. 앞집 미용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샷 하나를 내려 잔에 담고 온수를 가득 채웠다. 모락모락 김이 솟아나며 에스프레소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미용실 사장님이 반가워하시며 잘 마시겠다고, 고맙다 말한다. 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셨는지 물었다. 설 연휴는 이미 지났지만 덕담을 주고받을 이웃이 있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좋은 말 한마디 듣기 힘든 세상이라 그런 걸까?
아침 바람은 유난히 매서웠다. 아침의 기온은 영하 7도였다. 최고기온은 영하 4도라고 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영하 4도도 최고기온이 될 수 있구나.' 싸락눈이 수시로 흩날렸다. 도로 바닥에 깔린 눈가루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형체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오묘한 싸락눈의 인생살이. 바람을 따라, 자동차의 꽁무니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치이는 모습이 나를 닮았다.
며칠째 싸늘한 날씨였다. 히터 팬 돌아가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실외기에 문제라도 생긴 걸까? 하지만 바람소리가 너무 거세서 나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진동은 잦아들었다. 다행이었다. 오늘같이 추운 날씨에 히터라도 고장이 나면 카페 안은 냉골이 될 게 뻔했다. 자칫 실외기 수리라도 해야 한다면 지출도 만만치 않았다. '아직은 괜찮을 거야.' 불안을 잠재우려 아무 위안이나 던져본다.
서랍장의 문이 떨어져 나갔다는 아내의 연락을 받았다. 이사를 준비하던 중 얼마 쓰지도 못했는데 레일이 다 망가져버린 서랍장의 처분을 고민했었다. 부서진 나뭇조각이 그 고민을 말끔히 해소시켜주었다. 물건도 저 갈 날을 아는 것일까? 가구단지에서 싼 맛에 산 서랍장은 딱 그 가격만큼만 버텨주었다.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서랍 바닥은 꺼졌고, 속은 더 엉망이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딱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부서져가는 서랍장처럼 카페 물품들도 하나둘씩 고장 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노마진도 아닌 마이너스 매출로 1년 가까이를 버티는 동안 가게 수리는 사치였다. 자잘한 고장은 그때그때 수리하며 버텨왔지만 수명이 다 되어가는 물품들을 생명 연장하는 데는 한계가 존재했다. 정든 식구를 떠나보내고 새 식구를 맞아야 할 시기가 왔는데 여전히 신규 확진자는 600명대를 아우르고 있다. 언제 불황이 끝날지 모를 지금 상태에서 대규모 지출을 벌였다간 자칫하면 가게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몰랐다. 한숨은 이럴 때 나오라고 있는 것인가 보다.
고민을 잊으려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몸을 맡겨본다. 마침 "땡큐, 땡큐, 땡큐" 3번이 반복된다. 그래. 이 모든 것에 감사해야지. 삶이 불안에 잡아먹힐 것 같을 때면 나는 글을 쓴다. 이상하게도 글을 쓰다 보면 불안은 눈 녹듯 사라진다. 다시금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사람 목숨이라는 게 얼마나 허망하게 갈 수 있는지 절절히 느꼈던 시간들에 비하면 지금의 고민은 양반일 테지. 미래에 대한 불안도 건강할 때나 느낄 수 있다. 불안은 살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죽어버린 현실 속에서는 아무런 불안도 느껴지지 않는다. 불안과 증오조차도 사라진 상태. 그런 절망의 끝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나는 여전히 작고 사소한 것에도 심하게 흔들리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는 살기 위해 가쁜 숨을 내쉴 수 있다.
퇴근 시간인가 보다. 어둑어둑해진 거리 사이로 차들이 내뿜는 불빛들이 줄지어 움직인다. 하루의 고된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인다. 발걸음이 향하는 곳에는 따뜻하게 맞이해줄 가족들이 있을 것이다. 어깨에 짊어진 것이 때로는 버겁게 느껴지더라도, 결국 그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존재는 가족일 것이다. 문득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내의 페이스톡 전화가 걸려왔다. 무심하게 받아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가 엄마 손을 으스러져라 잡으며 예방주사를 맞고 온 이야기, 카페에 우유 몇 개 필요하냐는 이야기, 택배를 꺼내고 뒤돌아보니 막내가 들어가 있었다는 이야기, 날이 추워서 뜨끈한 어묵탕이 먹고 싶다며 이따 출발할 때 연락하라는 뭐 그런 사소한 이야기들.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꽤나 먼 길을 돌아온 것 같다. 과거는 아름답게 만들기 참 좋은 소재인 것 같다. 이미 지나간 일들은 여전히 그 순간에 붙잡혀 불안과 두려움에 떨 필요도, 고통스럽게 있는 그대로 짊어지고 갈 필요도 없다. 과거는 과거로 두고 현재에 충실할 뿐. 기억해야 할 과거는 사진첩을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 나는 미래에 펼쳐볼 소중한 사진 한 장을 글로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