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

제1편, 판단, 집중, 성찰, 문제의식

by 작가 전우형

* 경고, 재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판단 : 모르기 때문에 판단하지 않는다.


나는 아바이 순대를 파는 아주머니의 숨은 인생도 알지 못하고, 생물학 교과서에 나오는 '양성 되먹임'이나 '음성 되먹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모나리자가 어째서 어느 쪽에서 보든 나를 쳐다보는지도 모르고, 어째서 이 화창한 봄날 아침부터 수도 보수공사를 한다며 멀쩡한 땅바닥을 헤집어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호수 모자를 쓴 사람이 하라는 신호수 일은 하지 않고 보도블록에 걸터앉아 담배나 꼬나물고 있는지도 모르고, 응급실 앞에 왜 경찰차와 시신 운구차량이 서 있는지도 모른다.


화이자 백신이 좋은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좋은지 나는 모른다. 누가 그 백신을 맞고 죽었는지도, 그의 돌연사가 백신 때문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성급히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싫어요'를 누르지 않는다. 나는 그저 어느 백신이 좋은지를 따지기보다 사람을 만날 때 마스크를 쓰고 가급적 거리를 두려 애쓰며 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한다.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불철주야 고민하고 애쓰는 그들의 노력과 시간에 감사한다. 노력의 질과 성과를 따지기에 앞서 그들의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나 역시 최선을 다한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지켜달라 외치는 것들을 묵묵히 지키는 방식으로.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암흑 속에 많은 것이 실재함을 느낄 때 비로소 깨닫는다. 단절은 만남을 이끌고, 모름은 지혜를 선물한다. 그리하여 죽음 앞에 서면 많은 것을 깨닫게 되는지도 모른다.




집중 : 모르기 때문에 현재에 집중한다.


죽음은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고, 모두에게 공평한 이별을 선고한다. 부자도 죽고 빈자도 죽는다. 똑똑한 사람도, 성공한 사람도, 남을 발가락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사람도 죽음만큼은 피해 가지 못한다. 생명의 멱살을 쥐고 흔들어도 죽음의 손길은 뒷덜미에 닿아 있다. 삶이란 곧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므로.


영원히 헤어질 것 같지 않던 부부도 결국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직 죽어보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 이후에 삶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죽음을 모르기에 죽음이 두렵고, 두려움을 덮기 위해 현재를 산다. 최선에 대한 수많은 정의들을 두고 나는 현재에 집중하는 것을 택했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 삶의 터전, 함께하는 이들. 그 모든 것들에 집중하다 보면 오늘 하루를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성찰 : 모르기 때문에 나를 만난다.


언제부턴가 너무나 쉽게 잘잘못을 판단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는 나를 발견한다. 드러난 것을 전부라 여기고 우습게 생각하거나 무시하는 나를 본다. 그들의 이유를 들어보려 하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자리를 뜨는 나를 본다. 대화보다는 주장을 하고, 근거 없는 판결문을 읽었던 나를 반성한다.


많은 것을 안다 자부하고 자뻑에 빠진 사람들이 꼴 보기 싫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고, 성취를 기준으로 인생의 품질을 재단하는 꼬락서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어이없었고, 때때로 번듯한 외형과 말투에 속아 넘어가는 내가 싫었다.


'앎'에 대한 자기 인식 수준을 평균 이하로 보는 관점은 어쩌면, 지식 쪼가리 같은 학벌이나 자격증, 기업이나 대학의 네임밸류, 수능이나 토익점수 같은 것들에 기대어 으스대고,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에 대한 '알러지반응'일지도 모른다. 결국은 내가 그들만큼 잘나지 못했다는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비판도 해본다.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결국 누구나 죽고 만다는 사실은 퍽 통쾌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돈다발 따위를 저승길에 싸 짊어지고 갈 수 없다는 사실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수명을 살 수 없다는 것도 내게는 까스활명수나 사이다 같은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나 역시 돈나무에 물을 준다. 돈이 주렁주렁 열리기를 바란다. 할 수만 있다면 생계 걱정 따위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만 몰두한 삶을 원한다. 나라는 인간 역시 이처럼 이중적이다.




문제의식 : 모르기 때문에 문제를 본다.


부러움과 시기심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른다. 풍족하지 않은 나는 돈 많은 사람이 부럽고 때로는 배가 아프다. 그들이 부의 금자탑을 쌓기 위해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대도 그런 식으로 금수저, 흙수저가 나뉘는 현실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돈이 많은 게 아니라 돈 많은 부모님을 만났을 뿐이잖아?라는 생각에 머무는 나를 발견한다.


제대로 된 노력도 해보지 않고 돈 많은 사람이면 그저 욕하기 바쁘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당연했던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평생 동안 당연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어서다. 그 배경에는 내가 '불로소득'이라 여기는 것들이 있다. 은행이자, 부동산, 주식 같은 것들. 그런 것들로 노력해서 부를 증식한 이들이 동의하건 말건, 나는 이런 것들은 불로소득으로 치부한다.


그 배경에는 십수 년간의 직장생활의 형편없는 결과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직업군인을 시작하고 13년간 벌어들인 급여의 총액이 대략 4억을 조금 넘는다. 하지만 같은 기간 동안 수도권의 20평형대 아파트의 가격은 3억에서 7억 원대 이상으로 치솟았다. 숨을 헐떡이고 건강을 갈아 넣으며 13년간 벌어들인 돈보다(물론, 현재까지 남아있지는 않다.) 단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올라버린 부동산 가격이 더 크다면, 여기에 허탈함을 느끼지 않을 이가 있을까?


그럼 너도 거기에 집 사두면 되지 않았냐고 따질만한 대목이다. 하지만 '하나'은행님은 만인에게 공평하지 않고 아무에게나 수억씩 부동산에 투자하라고 대출해주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런 식의 부의 증식과 대물림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못하게 하고, 누군가는 열등감과 피해의식으로, 누군가는 아집과 오만으로 벽을 쌓게 만든다. 어쩌면 부의 괴리가 만들어내는 사람 사이의 커다란 장벽이 진짜 고민해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 2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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