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면 다친 무릎이 욱신거린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사고의 기억이 이제 희미해진 흉터 자국보다 더 선명해서다. 이런 통증은 단순히 아프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마치 이식된 피부처럼 어색하고 불편하다. 아픈 곳을 정확히 짚어내기도, 증상이 어떻다 설명하기도 어렵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버티다 보면 조용히,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꾀병이라고 하기엔 지극히 현실적인 감각임에도 불구하고 증명할 방법은 없다.
고통은 고통을 끝내기 위해 존재한다. 오토바이 소리만 들려도 무릎이 욱신거리는 것은 이런 뜻이다. 배달용 스쿠터가 초록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던 너를 다시 기절시키지 않도록 다시 한번 주변을 살펴라, 혹은 일단 멈춰 서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들의 위치를 확인하라, 와 같은 경고 메시지. 예컨대 물에 빠졌던 사람이 다시 물 앞에 섰을 때 몸이 굳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에 빠졌던 기억은 절망과 닿아있다. 죽을힘을 다 해 팔다리를 저어도 몸이 물속으로 조금씩 가라앉던 순간, 필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어도 입과 코로 물이 밀려들어오던 순간처럼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버려진 갓난아기의 무능함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된 기억들은 단지 물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온몸을 굳어버리게 한다. 이제 멈춰 서라고. 그 위험에 너를 다시 던져 넣지 말라고. 과거의 절망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몸과 마음이 예상되는 위험과 고통에 격렬히 저항하는 것은 생명체로써의 본능이다. 하지만 고통을 피하기 위한 내면의 장치가 고통과 위험을 더욱 가중시킬 수도 있다. 개에 물려본 사람은 개를 보면 공포로 몸이 굳어버린다. 물에 빠졌던 사람은 발바닥이 잠시만 물에 닿지 않아도 통나무처럼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고통은 생존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어떤 고통은 그 자체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각각의 경험은 서로 다른 질량으로 저장된다. 의미 없는 시간들은 '나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처럼 한 문장으로 기억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순간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다. UHD 화면처럼 당시의 상황, 분위기, 냄새, 소리, 말투, 표정, 감정을 털끝 하나까지 저장해서 기억의 프레임과 용량을 급격히 높인다.
중요한 순간을 무거운 기억으로 남기는 이유는 많은 단서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같은 고통을 반복하지 않을 단서. 단서가 많을수록 위험을 피할 확률은 높아진다. 하지만 이러한 예측은 의외로 허점도 많다. 아주 작은 부분만 일치해도 대응 태세를 극단적으로 높여버리기에.
고통스러운 기억을 많이 남기는 것과 쉽게 잊어버리는 것 중 어느 쪽이 좋은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통을 잘 기억하는 쪽은 다시 힘들지 않기 위한 선택으로 무게추가 더 기울 것이고, 상대적으로 그런 기억이 무게가 덜한 쪽은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일부는 극복해 갈 것이다. 난 이 중에서 전자에 속한다. 아마도 스펙트럼에서 거의 맨 바깥쪽에 위치할 것이다. 몸도 마음도 그렇다. 겁이 많고 못하는 것도 많다. 그래서 글을 쓴다. 글을 쓰면서 그런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나를 분석해본다. 지나친 대응이었는지 아닌지를 가벼운 마음으로 판단한다. 그때는 그럴듯하지만 지나고 보면 또 유사한 반응을 보인다. 결국 인간은 쉽게 변할 수 없다는 사실만 깨닫고 만다. 그럼에도 또 이런 치부를 글에 담아내는 건 누군가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서다. 어쩌면, 이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