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는 항상 평택 국제 대교를 지난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는 참으로 모르는 것이 많다. 그중 하나가 강도 가끔 얼어붙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얗게 변한 안성천을 보며 처음에는 하천 위에 하얀 거품이 깔린 줄 알았다. 인근 공장에서 폐수가 흘러나온 건가 하고 놀라기도 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거품이 너무 광범위하게 하천을 덮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분명 얼음이었다. 세상에! 하천이 얼어붙을 정도의 추위라니. 정말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었다. 사진에 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정차할 곳이 마땅치 않은 다리 위였다. 고민이 화근이었다. 고민하던 사이 나는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곳까지 이동해버렸다. 이전에도 다뤘지만 나는 갑자기 꽂힌다고 해서 바로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는 병이 있다. 고상한 말로 '궁상'이라고도 부른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스무 살이 넘으면 성격은 '상수'라고 했다. 안타깝지만 그게 내 성격이고 내 한계인 것이다. 각설하고, 그렇게 인생 사진을 남길 기회를 날리는 한편으로 새롭게 떠오른 생각은 러시아인이 이런 나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얼어붙은 하천이며 바다가 늘 보던 풍경일 텐데, 그 모습을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내가 신기하지 않을까? 만약 친구 사이라면 "너 이런 거 처음 봐?" 하고 웃음기 섞인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러시아가 그토록 땅덩어리도 얼마 되지 않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지키려는 이유도 부동항, 그러니까 얼어붙지 않는 항구를 보유하기 위함이라고 했지.
러시아인과 나는 '부동항'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사뭇 다를 것이다. 나처럼 액체 상태의 강과 바다를 상수로 알고 있던 사람은 부동항이라는 말을 들으면 '1년 내내 얼지 않는 항'을 떠올린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을 말하는 건가? 하는 생각부터 든다. 하지만 러시아인에게 부동항이란 '1년 내내 얼어있지 않는 항'을 말한다. 어라? 막상 표현해보니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강조되는 부분이 다르다. 전자의 경우 '1년 내내'에 악센트가 붙지만 후자의 경우 '얼어있지 않는'에 악센트가 붙는다. 그러니까 러시아인에게 부동항이란 하계절의 일부라도 얼어있지 않아서 항구로 사용할 수 있는 항을 뜻하는 것이다. 바다가 늘 얼어붙어 있으면 배가 드나들 수 없다. 모든 배를 쇄빙선으로 개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쩌면 내가 오늘 얼어붙은 안성천을 보며 느꼈던 이색적인 감정을 러시아인들은 따뜻한 하계절의 어느 날 얼어붙어 있던 바다 사이로 조각난 얼음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보며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의 꼬리물기가 시작된다. 그들과 내가 '부동항'이라는 같은 단어를 듣고도 서로 다른 모습을 떠올리는 까닭은 우리가 자신을 둘러싼 가장 흔하고 눈에 익은 환경을 '세상'이라는 상수로 인식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평소에 늘 보던 모습들이 각자의 주관적 세상을 구성하고 그 퍼즐 조각이 모여 만들어낸 하나의 그림은 우리가 세상이라고 굳게 믿는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가 된다. 그리고 결국 각자가 만들어낸 '세상'이라는 그림이 얼마나 딱딱한 상수로 자리 잡는가의 문제가 갈등의 씨앗이 된다. 갈등을 감소시키는 방법은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님을 인식하고, 그 세상은 나의 경험과 일부 학습된 정보들로 구성된 온전하지 못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타인의 세상은 나와 다를 수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자세를 갖는 것이고 그것을 위한 당위를 형성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생각의 틀을 가졌다고 해서 틀린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것이며, 타인의 세상에 나름대로의 역사와 배경과 근거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세상은 생의 경험이 축적되어감에 따라 점차 확장되어간다. 예컨대, 아이에게 처음의 세상은 '자궁'이라는 좁고 어두컴컴하며 온갖 장기 소리로 시끄럽고 엄마의 온기로 따뜻하며 양수로 가득 차 늘 출렁이고 미끈거리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분명 이런 공간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인간이 살아가기에 충분히 넓지도, 자유롭지도 못한 공간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곳이 좁고 답답하다거나 숨 막힌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런 조건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자궁 밖의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번 상상해보자. 만약 돌 지난 아이를 다시 엄마 뱃속과 유사한 공간에 넣어둔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마도 10개월은커녕 단 며칠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충분했던 세상이 좁고 답답해지는 건 그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답답함은 자신이 그곳이 끝이라 여겼던 벽 너머의 세상을 맛본 사람에게 주어질 필연적 고통이자 갈등의 씨앗이다.
여기서 질문. 그렇다면 살아온 시간이 길수록 한 사람의 주관적 세상은 확장되고 완성되어갈까? 아이의 세상보다 어른의 세상은 보다 많은 것을 담고 보다 많은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덜 배운 사람보다 많이 배운 사람의 세상은 보다 많은 것을 담고 보다 많은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오히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세상이 위축되거나 한쪽으로 기울지는 않을까?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원인은 무엇에 있을까? 쉽게 결론지을 수 없는 부분이다. 너무나 많은 변수들이 존재할 것이다. 매일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공간과 같은 상황, 같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삶에서 살아온 시간에 비례해 세상이 넓어진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타인과의 적절한 연결, 원활한 관계 맺음과 수용은 마치 개화기를 거치며 신문물이 쏟아지던 때처럼 한 사람의 세상을 폭발적으로 확장하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한쪽 방향으로만 곧게, 멀리 뻗어나가는 것이 세상이 확장되는 온전한 방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 가지 그물에 걸린 단어는 '겸손'이다. 겸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의 세상만 완벽하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도 겸손이고, 타인의 세상을 함부로 틀렸다고 무시하지 않는 것도 겸손이다. 타인의 세상을 받아들이기 위한 태도도 겸손이고, 타인의 마음을 공감하고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며 타인의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단추도 결국 '겸손'이다. 누군가의 세상이 오히려 편협해지거나 새로움을 밀어내는 쪽으로 흘러간다면 겸손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겸손을 잃으면 오만에 빠진다.
오만한 사람은 입은 열리되 귀는 닫힌다. 자기가 할 말만 하고 타인의 말은 듣지 않는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선택적으로 사고한다. 사건의 본질과 무관하게 자신의 오만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를 확보하는데만 충실을 기한다. 남 탓을 위한 준비에 매진한다. 타인의 결점을 꼬집는 일은 자신의 실수를 감추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당연한 과정이다. 그래서 오만한 이의 세상은 보다 많은 것을 담을 수 없고, 보다 많은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으며, 왜곡되고 균형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겸손을 잃으면 살아온 시간이 길어도, 어른이 되었어도, 많이 배웠어도 그의 세상은 오히려 퇴행하고 축소된다. 그런 끝은 불행하다. 분명.
그래서 다짐. 때로는 그 오만이 현실에 존재하는 부의 생산원리와 결합해 남부러운 성공으로 비치더라도 부러워하지 않기로. 밤늦은 기도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