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1. 이것들을 지금 가방에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나는 종종 고민에 빠진다. 읽던 책을 덮은 후 가방에 다시 넣을지 아니면 책상 한쪽으로 밀어둘지. 또한 고민에 빠진다. 수첩을 다시 가방에 넣어둘지 아니면 역시 책 위에 놓아둘지.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다시 책을 읽고 싶을 때, 다시 무언가를 끄적이고 싶을 때 책상 한쪽에 그것들이 있는 상황과 가방에서 다시 꺼내어야 하는 상황 중에서 어느 쪽이 에너지가 덜 들까?
또한 고민하는 것이다. 좁은 책상 위에 수첩과 책이 놓여있음으로 인해 무언가를 새로 펼치거나 꺼낼 때 그것들을 이리저리 옮기는 수고를 감수하는 편이 나은가 아니면 현재의 용처를 잃어버린 것들은 미래의 용처가 새로 생길 가능성과 관계없이 정신 사납지 않을 곳에 정리하는 편이 나은가.
고민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책과 수첩은 내일 또 쓸 것인데 책상 위에 두는 것과 가방에 넣어두는 것 중 어느 쪽이 내일 가방을 다시 열었을 때 아연해지지 않을 가능성을 높여주는가? 즉, 내가 아침에 책상에 놓아둔 수첩과 책을 가방에 집어넣는 일을 잊지 않을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어느 쪽이 내 정신건강에 더 이로운가? 책상 위에 그것들을 놓아두었을 때 오늘 밤이 지나기 이전에 다시 펼쳐볼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이 모든 것들이 내가 하는 쓸모없는 고민들이다. 내가 이런 고민에 종종 빠지고 만다는 것을 아내가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도 입이 5cm쯤 벌어진 채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10초 이상 나를 바라보겠지. 그리곤 소리칠 것이다. "오늘 밤에 절대 다시 볼 일 없으니까 당장 가방에 집어넣어!" 나는 아내의 판단이 90% 이상 정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분명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하고는 분명 책상 한쪽으로 책과 수첩을 밀어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결국 다시 펼치지 않은 책과 수첩을 보며 나는 생각하겠지. '어제는 펼쳐보지 못했군. 가끔 그런 날도 있는 거지.' 아마도 이 생각을 아내가 우연히 알게 된다면 혀를 차며 뾰족한 음성으로 대꾸할 것이다. "'가끔'이란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고민 2. 지금 출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나는 이런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시골길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왼쪽에서 우회전 방향지시등을 켜고 다가오는 차량이 있다. '아마 예정대로라면 그는 내가 서서 기다리는 갈림길에서 우회전을 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지금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고 좌회전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야.' 하지만 나는 통상 이런 상황에서 그 차가 확연히 오른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순간까지 기다린다. 이런 고민 때문이다. '운전자가 자기도 모르게 방향지시등을 켰을 수도 있잖아? 초보 운전자라면 그런 실수를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나도 가끔은 비상등을 켠 채 달리기도 하잖아? 저 차가 만약 실수로 우회전 방향지시등을 켜고선 그대로 직진하는 중이라면 지금 출발했다가 부딪힐 수도 있어.' 아마도 옆에 베스트 드라이버인 목사님이 있다면 그런 고민에 빠져 주저하는 내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전 집사님? 안 가고 뭐해요? 저 차 이리 빠진다잖아요." 그러곤 여전히 주춤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내게 윽박지르듯 말할 것이다. "에이, 괜찮다니까. 빨리, 출발! 출발~!"
고민의 이유를 되짚어본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저 답답한 사람이 되고 말 테니까. 일종의 발악 같은 거다.
<고민 1.>에 대한 분석
첫째. 나는 후회가 많은 편이다. 꼭 그런 기억들만 남는다. 예컨대 수첩을 가방에 다시 집어넣었는데 다시 쓸 것이 생길 경우,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괜히' 가방에 넣었다고 자책 반 후회 반을 한다. 그저 다시 가방을 열고 꺼내서 쓸 걸 쓰면 되는데 그 동작을 수행하는데 요구되는 에너지의 양 이상으로 훨씬 더 불편하게 느껴진다.
둘째, 작은 일도 실수하는 게 싫다. 내가 바보처럼 여겨진다. 누가 지적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셋째. 미련 덩어리다. 읽지 못할 가능성이 99%에 가까운 책도 가방에 집어넣어 무게를 늘린다. 결국 그 책을 한 번도 펼쳐보지 못했어도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신비한 능력을 발휘한다. 반면에 만약 그 책을 챙겨가지 않았는데 문득 펼쳐보고 싶어질 경우 굉장한 스트레스에 휩싸인다. 아침의 순간순간이 떠오르며 왜 그 사소한 것 하나를 챙기지 못했는지에 대한 후회가 남은 하루를 여름 모기처럼 따라오며 윙윙댈 것이다. 별로 오랜 시간 볼 것도 아닌데, 그저 집에 가서 보면 되는 일인데, 그 일이 그렇게 큰 후회로 남는다. 이쯤 되면 병인가? 위의 고민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까 나는 무척 '사소한' 선택이라도 비효율적인 결과가 뒤따르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고민 2.>에 대한 분석
첫째. 타고난 성격 때문이다. '신중'하다고나 할까? 단계가 많이 필요하다고 할까? 하여튼 이리저리 재고 따지는 일이 많다. 좀처럼 확신이 생길 때까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편이다. 직장에서는 덕도 제법 보았다. 특히 문제를 일으키거나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쪽으로 말이다. 다만 너무 사소한 일에도 비슷한 유형의 성격이 발동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둘째, 문제가 생기고 나서 뒤처리하는 일을 끔찍하리만치 싫어한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쪽으로는 퍼포먼스가 매우 떨어지는 편이다. 잘못된 일로 인해서 누군가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상황에 놓이거나, 사과를 해야 하거나,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나, 혹은 매우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 그러한 절차가 결국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함으로 인해 누군가와의 관계가 틀어지는 상황 등은 내게 매우 힘든 상황이다. 예컨대 내게는 당장 삼거리에서 고지식하리만치 기다리는 일이 '겨우'(적어도 내게는) 몇 초(혹은 그게 몇 분이라고 해도) 빨리 출발하려다 예상치 못한 위협을 자초하는 일보다 훨씬 편한 것이다. 그 일로 만약 다가오는 차와 접촉사고라도 벌어진다면 그 여파의 심각성(부상의 정도나 재물손괴 정도, 그러니까 치료비나 수리비 등등)과 하등 관계없이 나는 '섣부른 판단으로 시간을 불필요하게 낭비한 것이나 다른 곳에 써야 할 귀한 에너지를 엄한 곳에 누설시킨 것'에 대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고 말 것이다.
셋째, 활력이 부족한 편이다. 좋지 않은 일로 누군가와 옥신각신하며 사고처리를 하고 나면 그날 하루를 홀라당 날려버릴 것이 분명하다. 상대 운전자와 네 탓이네 내 탓이네 하던 중 "당신이 분명 우측 깜빡이 켜고 있었잖아요!" 하고 따질만한 전투력 또한 미약한 편이라 상대방이 "내가 언제요?" 하고 반박할 경우 블랙박스를 돌려볼 궁리를 하다가도 그냥 더 싸우기 싫어 그만두고 말 것이라는 것도 안다.(솔직히 말해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말싸움하는 것을 싫어한다. 특히나 적대적인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니 나는 '어지간하면' 매번 그 자리에서 고민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쪽이 예상되는 고통이 덜하고 상대적으로 쾌락의 손실도 적을 테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이건 적절한 분석이나 변호라기보다 내가 왜 지지리 궁상인지 민낯을 스스로 드러내고 만 느낌이다. 그럼 그렇지 하고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을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하지만 고민 1,2에 대한 분석을 보고 있으니 스스로도 고구마 200개를 삼킨 느낌이 들어서 대꾸할 말이 없다. 그래서 결론.
역시, 고민에는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