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도 패자도 눈멀게 하는 경쟁사회의 스포트라이트
전편에서 경쟁사회가 몰아준 특권이 최소한의 상식조차 짓밟을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더 눈여겨볼 부분은 경쟁의 결과가 빚어낸 찬란한 금덩이가 경쟁을 과열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점이다.
경쟁사회는 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와 연결되어 경쟁에서 승리한 일부에게 명예와 재화를 몰아주며 이것은 승자의 '권위'로 굳어진다. 승자의 권위는 강력한 후광효과가 되어 경쟁에 뛰어드는 다음 세대로 하여금 분투의 방아쇠를 당기도록 현혹하고 조종한다. 능력주의와 접목된 경쟁사회는 승자를 추켜세움과 동시에 패자에게는 절망을 안긴다. 가혹한 불평등을 목격하며 자라난 다음 세대는 치욕스러운 패자로 남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좁은 관문으로 뛰어든다. 처절한 경쟁의 끝에 뒤집을 수 없는 결과가 존재함을 절감한 후에는 헤아릴 수 없는 절망에 빠진다. 경쟁의 결과가 초래한 불평등은 경쟁을 더욱 과열시킬 뿐 아니라 서로 간의 증오와 분노마저 키운다. 이것은 경쟁사회의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기도 하다.
경쟁사회의 부작용은 단지 부의 불평등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 저변으로 뻗어나간다. 유난히 명석하고 이해가 빠른 사원 A가 있다. A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쳤고 때로는 지시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해결하는 적극성도 보였다. 알고 보니 그 대원은 KAIST 출신이었다. '역시 명문대 출신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편견 어린 시각은 교육현장을 비롯해 사회와 직장 저변에 뿌리내린 지 오래다.
그러나 출신 대학에서 비롯된 편견의 이면에 '입시'라는 경쟁을 통한 인재 선별시스템이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출신 대학의 간판에 대한 편견은 교육의 결과라기보다 경쟁의 산물이다. A가 KAIST에서 수학했기에 이해력이 좋고 눈치가 빠르고 업무의 질이 높다기보다 A와 같이 학습능력이 이미 뛰어난 학생들이 입시경쟁을 통해 KAIST와 같은 명문대로 집결되었기에 발생한 후천적인 결과물이다. 더불어 그렇게 사회로 진출한 엘리트는 사회 한편에 공고한 세력을 형성하고 전문가 중심의 관료체제와 맞물려 사회의 영향력 있는 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권위 있는 졸업생은 소속 학교에 강력한 후광효과를 제공한다. 졸업생의 성공이 출신 대학과 밀접한 영향이 있다고 판단한 다음 세대는 더욱 경쟁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출신 대학에 대한 편견은 편견이 아니라 능력에 관한 실질적인 차이를 반영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명문대의 잘 짜인 커리큘럼과 훌륭한 교수진이 졸업생의 수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같은 학생이 한국에서 SKY로 대표되는 명문대보다 대학 서열이 낮은 여타의 대학에 진학했을 때 과연 그의 학습능력이 크게 떨어질까? 바꾸어 말해 학습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학생이 명문대의 커리큘럼에 따라 교육받는다면 그의 학습능력이 크게 높아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탐색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악화된 대학 서열화, 극복 방안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제2회 대학정책포럼(2016)에서 장수명 교수는 입시경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얼핏 보기에 우리의 고등교육체제는 다양한 주체들이 대학을 세울 수 있고 누구라도 대학에 가고 졸업도 할 수 있는, 그야말로 '꿈의 고등교육체제'다. 그러나 자신이 진정으로 가고 싶은 대학에 가서 갖고 싶은 졸업장을 가지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자격증을 얻었다 해도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한다. 결국 꿈의 고등교육체제는 거의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악몽의 고등교육체제'로 드러난다."
입시 경쟁은 치열해진 반면 오히려 일부 승자(원하던 명문대 졸업장)를 제외한 다수에게는 오히려 대학 졸업장의 전반적인 가치 하락을 가져왔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학력의 상향평준화는 취업에 요구되는 스펙을 필요 이상으로 높임과 동시에 학벌의 지위재적 성격도 강화하고 있다.
또한 장수명 교수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언급한다. "서열이 높은 대학일수록 지원자가 몰리니 자격을 엄격하게 따지게 되고, 입학자격을 엄격히 따질수록 대학의 서열과 명성은 높아진다. 상위그룹의 대학도 학생이 자신의 교육과정을 이수할 역량이 되는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학생이 가고 싶어 하고 학부모가 보내고 싶어 하는 세칭 일류대학의 수업과 프로그램을 다른 대학의 많은 학생들에게 개방하는 실험을 해보면 알 수 있다. 그 일류대학의 서열보다 다소 떨어지는 많은 대학의 학생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이 떨어지는 대학의 학생 가운데 학습의지와 잠재력을 지닌 학생들은 그 일류대학의 교과과정을 무리 없이 잘 해낼 것이다."
결국 대학에 따라 졸업생의 역량에 어떤 확연한 차이가 실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대학교육의 역량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학생 자체의 역량 차이임을 말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Case by Case'로 보아야 하겠지만 현 입시제도 하에서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은 그곳에 집결하기 이전부터 공부에 특출난 학생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명문대 출신자가 때때로 뛰어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명문대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학습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가 뛰어난 학습능력을 지니고 태어난 것은 그의 노력이라기보다는 운의 결과다. 하지만 만약 그런 학생들에게 "너는 운이 좋아서 똑똑하게 태어난 거야"라고 한다면 그들은 펄쩍 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얼마나 치열한 노력을 거듭하며 이곳에 도달했는지 강조해서 설명하기 시작할 것이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이 곳까지 올라왔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때때로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차후에 함께 다뤄볼 예정이다.
경쟁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같은 목적에 대하여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룸', '생물이 환경을 이용하기 위하여 다른 개체나 종과 벌이는 상호 작용. 생물의 개체 수가 공간이나 먹이의 양에 비하여 많아지면 생긴다.' 이처럼 경쟁 자체에는 악의가 배제되어 있다. 어쩌면 인간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생존경쟁의 장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입시과열은 사전적 정의로서의 경쟁과는 거리가 멀다. 대학 정원이 이미 학생수를 넘어서가는 탓에 한계 대학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잦아들 줄 모르는 입시과열은 경쟁사회의 그림자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경쟁사회의 여건이 정의롭건 그렇지 않건 자식을 보는 부모의 시각은 조금 다르게 보인다. 비록 현 시스템이 흡족하지 않더라도 내 자식이 사회에서 뒤떨어지는 것은 그보다 더 현실적이고 가슴 아픈 문제일 것이다. 그런 부모들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경쟁시스템을 분해하고 바꿔보려 하기보다 일단 현재의 경쟁시스템 내에서 자녀의 미래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더불어 이미 경쟁시스템을 잘 활용해 기득권으로 올라선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 또한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성공을 굳혀가길 바란다. 어떤 부모에게는 자식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학력이 높고 학벌도 좋은 부모라면 자녀가 "따라지"학교에 가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여러 가지 문제와 생각들이 뒤엉켜 부모는 내 자녀가 사회진출의 초입에서 '명문대 졸업장'이라는 찬란한 왕관을 쓰고 출발하길 염원하게 된다. 자녀를 위해서든, 자신을 위해서든 말이다. 목동이나 잠실 등 사교육 과열지역에서 초등학교 2학년이 중학교 2학년 교과목을 선행 학습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 지 오래다.
'명문대' 간판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단순히 '학벌' 이상의 또 다른 강력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학벌은 그의 '능력'을 증명함으로써 그의 성공을 더욱 정당하고 값진 것으로 포장해준다. 돈은 많지만 머리는 빈 부자에서, 부에 걸맞은 지적 능력도 갖춘 사람으로 변모시켜준다. 이런 현상에 대해 샌델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그러나 진짜 놀라운 점은 정치인들이 자기 대학 성적을 부풀린다는 데 있지 않다. 그들이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기는 점에 있다. 학력주의가 하도 만연한 나머지, 학교의 대문을 훨씬 넘어선 곳의 도덕, 정치 논쟁까지 좌우할 만큼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대학 학력의 무기화, 그것은 능력주의가 얼마나 폭정을 자행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p.144)"
조지프 피시킨은 저서 '병목 사회'에서 입시 병목현상의 원인을 학벌의 '지위재'적 성격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즉, 어느 대학을 졸업했느냐는 '간판'이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좋은 직업과 미래의 성공으로 가는 길목이 되어버렸을 뿐 아니라 능력주의 사회에서 그의 성공을 보다 정당하고 합당한 것으로 포장해주는 부수적인 역할도 한다. 능력주의 경쟁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편평한 운동장'이 완성되고, 능력을 갖춘 사람이 온전한 경쟁시스템 내에서 열심히 노력해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켰다면 누구도 그의 성공에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더불어 그에게 타인과 구별될만한 부와 명예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것도 말이다.
경쟁에서 '공감'과 '배려'는 죄악이다. 상대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은 그를 밟고 일어서는데 방해만 된다. 아이들은 성장과정에서 이미 경쟁 하나하나의 승리에 집착하게 될 뿐 아니라 경쟁구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경쟁구도에 최선을 다해 적응한 탓에 경쟁적 사고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도 어려워진다. 서열에 민감한 탓에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한치의 양보도 하려 않게 된다.
사회의 인재 선별시스템에 의해 걸러진 상위 1%의 학생들은 대학에서부터 그들만의 구분된 사회를 구성한다. 뛰어난 학습능력을 지닌 학생들이 명문대로 모인 탓에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엄밀히 말해 학습능력 이외의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며, 물리적 환경의 분리로 인해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만나 교류할 기회를 잃어버린 탓에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능력을 기르는 것도 어렵다. 전공의 집단 진료거부 당시 "정부에서 우리가 의대 공부하는데 교과서 살 돈 한 푼 보태준 적 있습니까?"라고 외치던 어떤 전공의 대표의 말처럼 성공의 지분을 오롯이 자신의 '노력'으로 돌리는 오만에 빠진다. 성공에 작용한 유무형의 사회 인프라와 수많은 운과 우연을 완벽히 무시하는 그들이 일류로 불리는 경쟁사회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기준'이 형성되고 사회가 분열되어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이제 경쟁사회에 대한 성찰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노력'은 경쟁사회에서 어떤 도덕적 지위를 지닐까? 성적이 높은 사람은 인간으로서도 훌륭할까? 능력 있는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 성공을 쟁취했다면 그에게 부와 명예가 집중되는 것은 정의일까?
(계속)